24 조건과 일상생활
(원문 : ‘Different Aspects of the 24 Conditions(Chapter 17)’
of 'Conditions‘ By Nina Van Gorkom,
홈페이지 http://www.zolag.co.uk/ebook.html
or http://www.dhammastudy.com/advanced.html )
24조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헤뚜 빳짜야 (원인의 조건) 2. 아람마나 빳짜야 (대상의 조건)
3. 아디빠띠 빳짜야 (지배의 조건) 4. 아난따라 빳짜야 (틈없이뒤따르는 조건)
5. 사마난따라 빳짜야 (더욱틈없이뒤따르는 조건) 6. 사하자따 빳짜야 (함께생긴 조건)
7. 안냐만냐 빳짜야 (서로지탱하는 조건) 8. 닛사야 빳짜야 (의지하는 조건)
9. 우빠닛사야 빳짜야 (강하게의지하는 조건) 10. 뿌레자따 빳짜야 (먼저생긴 조건)
11. 빳차자따 빳짜야 (뒤에생긴 조건) 12. 아세와나 빳짜야 (반복하는 조건)
13. 깜마 빳짜야 (업의 조건) 14. 위빠까 빳짜야 (과보의 조건)
15. 아하라 빳짜야 (음식의 조건) 16. 인드리야 빳짜야 (기능의 조건)
17. 자나 빳짜야 (선의 조건) 18. 막가 빳짜야 (도의 조건)
19. 삼빠윳따 빳짜야 (서로관련된 조건) 20. 윕빠윳따 빳짜야 (서로관련되지않은 조건)
21. 앗티 빳짜야 (존재하는 조건) 22. 낫티 빳짜야 (존재하지않는 조건)
23. 위가따 빳짜야 (떠나가버린 조건) 24. 아위가따 빳짜야 (떠나가버리지않은 조건)
세존께서는 각 실재(담마)가 일어나는 조건들을 가르치셨다. 이 조건들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현재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몸과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각각의 적합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요소일 뿐이며 자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몸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자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삶의 첫 순간에 깜마(업)가 빠띠산디 찟따(재생연결의 마음)와 함께 하다야 루빠(마음 토대의 물질)를 비롯한 루빠(물질) 몇 가지를 생성시키고, 삶의 전과정을 통해 깜마(업)가 하다야 루빠(마음 토대의 물질)와 빠사다 루빠(감각 토대의 물질)를 계속 생성시킨다. 깜마 뿐만 아니라 찟따(마음)와 떼조 다뚜(불의 요소)와 오자(영양소)도 몸의 물질을 생성시킨다. 몸에 닿을 때 빠타비 다뚜(땅의 요소)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요소일 뿐이다. 아무도 그것을 일어나게 할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 몸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를 알아차림에 따라 우리는 그것들은 각 조건들 때문에 일어나는 요소일 뿐임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찟따(마음)가 많은 다른 조건들에 의존하여 일어난다. 찟따는 끊어지지 않고 서로 이어진다. 보는 작용(안식)은 계속 일어나고, 보는 작용(안식)이 사라진 후에 대개 아꾸살라 찟따(해로운 마음)가 일어난다. 우리는 보이는 대상(색)에 매달리거나 그것을 존재나 사람이라고 여긴다. 오염원(번뇌)은 축적되어 순간에서 순간으로 한 삶에서 다음 삶으로 전달되어 왔으므로 계속 일어난다. 그들은 이 순간에 일어나는 아꾸살라 찟따(해로운 마음)에 대한 ‘빠까뚜빠닛사야 빳짜야’(자연적으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다. 아꾸살라 찟따는 우리들의 천성이 되어 왔다. 그러나 아꾸살라(불선)의 해로움을 본다면 아꾸살라(불선)를 제거할 수 있는 지혜의 계발에 대한 조건이 있게 된다.
우리는 생물, 즉 사람과 동물들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고, 축적된 미혹함과 사견 때문에 실재에 대해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볼 때 실제로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 화면에는 빠르게 변화하는 투사된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움직이고 정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환영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시각을 통해 나타나는 서로 다른 색일 뿐인데, 우리는 보이는 것의 의미를 알고, 보이는 것 때문에 개념을 생각하게 된다.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것도 이와 같다. 실제 삶에서도 보이는 대상(색)에 대한 봄이 있고, 그리고 우리는 본 것을 영속하는 사람 또는 사물이라고 여긴다. 화면에서 보든 주위의 세계에서 보든 궁극적 의미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없다. 사람과 생물과 사물이 있는 세계는 인습적 의미에서만 진실이다.
세존께서는 궁극적 진리와 인습적 진리를 가르치셨다. 우리는 사람과 사물의 개념에 관한 인습적 진리에 대한 생각을 피할 필요는 없다. 개념에 대한 생각과 개념으로 취급하지 않고 우리는 일상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다. 우리는 다루고 있는 사물과 사건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개념으로 그들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도울 수 없다. 우리가 관대함(보시)을 계발할 때 우리는 줄려고 하는 선물을 생각하고 선물을 받는 사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친절함과 연민을 계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습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 사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언제 빠라마타 담마(궁극적 실재)가 찟따의 대상이고 언제 개념이 찟따의 대상인지 알도록 지혜를 개발해야 한다. 우리가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때, 그 순간에 일어나는 찟따는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려야 한다. 개념을 생각하는 찟따(마음)는 빤냣띠(개념)가 아닌 빠라마타 담마(궁극적 실재)이다. 일상생활에서 찟따의 대상은 빠라마타 담마이거나 빤냣띠이다.
육문을 통해 감각 대상을 경험하는 찟따는 빠라마타 담마를 경험한다. 그러나 사띠빳타나(마음챙김의 확립)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보이는 대상(색)이나 소리와 같은 루빠(물질)가 빠라마타 담마(궁극적 실재)인 줄 모른다. 사띠빳타나가 개발될 때에는 빤냣띠(개념)가 아닌 빠라마타 담마(궁극적 실재)만이 알아차림의 대상이다. 빠라마타 담마만이 있는 그대로 알아 차려야 하는 아닛짜(무상)과 둑카(고)와 아낫따(무아)의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특성을 알아차림에 의해 오염원(번뇌)이 제거될 수 있다.
우리는 꾸살라 찟따(유익한 마음) 또는 아꾸살라 찟따(해로운 마음)로 개념을 생각하게 된다. 붓다와 아라한들도 개념을 생각하지만 그분들은 개념에 속지 않는다. 그분들에게는 개념 때문에 오염원(번뇌)이 생기는 일은 없다. 우리가 개념에 매달려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고 영원한 사물 또는 자아라고 간주하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나 자아의 개념에 대한 집착은 많은 다른 종류의 오염원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큰 슬픔을 가져오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냈을 때, 사람들은 사랑한 사람에 대한 기억 또는 환영과 함께 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더라도 우리는 환영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감촉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우리는 실재한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실제로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개념, 즉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상적 이미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적합한 조건 때문에 일어나는 서로 다른 찟따, 즉 실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실재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환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이상적 이미지를 가지고 그들에 대해 기대하기 때문에 실재를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나마(정신 또는 정신적 현상)와 루빠(물질 또는 물질적 현상)를 배웠고 이들이 일어나는 조건을 배웠으나, 이론적 이해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궁극적 실재를 고찰하여야 한다. 우리는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은 단지 형성된 실재일 뿐이라는 것을 잊고 감각 인상에 쉽게 빠져 버리게 된다.
봄, 들음 그리고 다른 여러 감각의식들은 업의 결과인 위빠까 찟따(과보의 마음)임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위빠까 찟따는 업에 의해 생성된 각각의 감각 토대에서 생긴다. 이 감각토대들은 감각의식 전에 일어나서, 감각의식에게 ‘뿌레자따 닛사야 빳짜야’(먼저생긴 의지하는 조건)로 조건이 된다. 보이는 대상(색)과 다른 감각대상들도 감각의식 전에 일어나서, 감각의식에게 ‘뿌레자따 닛사야 빳짜야’(먼저생긴 의지하는 조건)로 조건이 된다.
일어나는 각 실재는 매우 복잡한 방법으로 작용하는 서로 다른 조건의 일치에 의해 나타난다. 우리는 나타나는 나마와 루빠에 대한 모든 조건을 꼭 집어 내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른 조건들에 대한 공부는, 실재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어떤 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각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어느 누구도 ‘보는 작용’이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 이전의 삶에서도 ‘보는 작용’이 있었고 다음 삶에서도 ‘보는 작용’이 있을 것입니다. ‘보는 작용’은 항상 보이는 대상을 본다. ‘보는 작용’의 대상은 항상 같지만, 보여진 것에 대한 생각은 변한다. 우리들 자신과 타인들은 과거에 다른 존재였고 현재에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으며 미래의 삶도 다를 것이다.
우리는 헤뚜 빳짜야(원인의 조건)에 의해 조건지워진 찟따에 따라 생각한다. 이들 찟따는 아꾸살라 헤뚜(해로운 원인) 또는 소바나 헤뚜(아름다운 원인)를 가질 수 있다. 보여지고 들리는 것 때문에 행복과 슬픔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를 모른다. 6문 중의 하나를 통해 나타나는 대로 하나의 실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는 실재를 알아차리는 순간과, 사람과 사물 등의 전체적 이미지로 생각하는 순간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보이는 대상 또는 소리를 바로 알아차림에 의해 우리는 오문(감각의 문)을 통해 나타나는 대상과 의문(마음의 문)을 통해 나타나는 대상을 구별하여 알 수 있다.
한번에 하나씩 나타나는 대로 실재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타인이 우리의 이상적 이미지에 따라 행동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누군가 우리에게 무례하거나 우리를 모욕할 때,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불공평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줄어들 것이다. 칭찬과 비난의 말을 들을 때, ‘듣는 의식’(이식)은 꾸살라 깜마(선업) 또는 아꾸살라 깜마(불선업)에 의해 생성된 결과(과보)이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때 오염원(번뇌)이 일어나기 쉽다. 우리는 들은 것을 심각하게 여기고, 들은 것은 단지 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잊는다. 우리의 축적된 경향성으로 인해 들은 것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게 되고, 그것을 오래 동안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집착 때문에 타인이 우리에게 말한 것이나 행한 것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인생은 짧다. 대상을 경험하는 순간은 매우 짧다. 대상을 경험하는 찟따가 없다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나 자아에 대한 그릇된 견해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소따빤나(예류자)는 사람은 없고 단지 조건지워진 나마와 루빠만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듣는 찟따’(이식)가 단지 소리만 듣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 실제로 어떤 자의 목소리란 것은 없다. 나의 목소리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아니다.
우리가 칭찬을 바라지 않을 때에는 비난에 대해 영향을 적게 받을 것이다. 모욕을 당할 때에도 화를 적게 낼 것이다. 우리는 용서를 배워야 한다. 용서는 관대함(보시)의 일종이다. 용서할 때에는 아쿠살라 찟따(해로운 마음) 대신에 꾸살라 찟따(유익한 마음)가 있다. 자아와 오염원에 대한 집착이 깊이 뿌리박혀 있으므로 모든 종류의 유익한 마음이 바른 견해와 함께 개발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나(자만)를 축적해 왔고 그것이 일어날 때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나(자만)가 방해하므로 타인을 용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그는 왜 나에게 이와같이 하는가?”라는 생각을 계속한다. 용서는 자만을 적게 가지는 하나의 수단이다. 선한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선한 행동”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고찰한 바와 같이 꾸살라(선) 조차도 아꾸살라(불선)에 대한 ‘빠까뚜빠닛사야 빳짜야’(자연적으로 강하게의지하는 조건)가 될 수 있다.
조건법을 공부하는 동안 우리는 아꾸살라 찟따(해로운 마음)의 조건이 되는 많은 인자를 알게 된다. 감각 대상은 ‘대상의 조건’, ‘대상으로 지배하는 조건’ 또는 ‘대상으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으로 아꾸살라 찟따(해로운 마음)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아꾸살라 헤뚜(해로운 원인)은 ‘원인의 조건’으로 아꾸살라 찟따(해로운 마음)의 조건이 된다. 각 ‘자와나 찟따’(속행의 마음)는 ‘반복하는 조건’에 의해 이어지는 찟따를 조건지우므로 아꾸살라 찟따(해로운 마음)가 일어날 때에는 하나의 찟따가 아니라 일곱개의 찟따가 연속하여 일어난다.
‘로바 물라 찟따‘(탐욕에 뿌리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은 다른 인식과정에서 나중에 일어나는 ‘탐욕에 뿌리하는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애착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집착을 축적한다. 지금 일어나는 탐욕은 미래에 일어나는 탐욕에 대한 ‘빠까뚜빠닛사야 빳짜야’(자연적으로 강하게의지하는 조건)가 된다.
우리는 애착을 후회할 수도 있는데, 이때 애착은 꾸꾸짜(후회)를 동반하는 ‘성냄에 뿌리하는 마음’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그와 같이 많은 오염원을 축적하여 왔으므로, 말은 유익한 마음보다는 해로운 마음에 의해 더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말에 집착하고 그것을 ‘자아’나 ‘나의 말’로 간주한다.
그러나, 고찰한 바와 같이, 그것은 말이라는 루빠(물질)를 생성하는 찟따(마음)이다. 그것은 말과 동시에 일어난다. 말하기를 결정하고 말이 일어나도록 지시하는 자아는 없다.
루빠(물질)를 생성하는 찟따(마음)는 ‘사하자따 빳짜야(함께생긴 조건)’, ‘닛사야 빳자야(의지하는 조건)’, ‘아하라 빳짜야(음식의 조건)’, ‘인드리야 빳짜야(기능의 조건)’, ‘사하자따 윕빠유따 빳짜야(함께생긴 서로관련되지않는 조건)’, ‘사하자따 앗티 빳짜야(함께생긴 존재하는 조건)’ 및 ‘아위가따 빳짜야(떠나가버리지않은 조건)’으로 루빠(물질)에 조건이 된다.
‘말’등의 루빠(물질)를 생성하는 꾸살라 찟따(유익한 마음)나 아꾸살라 찟따(해로운 마음)는, 헤뚜 빳짜야(원인의 조건)로 루빠(물질)에 조건이 된다. 찟따(마음)가 ‘사하자따 아디빠띠 빳짜야’(함께생긴 지배의 조건)이 될 수 있는 네 개의 인자 중의 지배 인자이면, 그 찟따는 ‘사하자따 아디빠띠 빳짜야’(함께생긴 지배의 조건)으로 루빠(물질)에 조건이 된다. 조건법의 공부는 우리들의 삶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해 준다. 우리는 우리 삶의 사건들을 조정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현재와 미래에 아꾸살라(불선)가 일어나도록 조건지우는 많은 인자가 있다. 이 조건들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아꾸살라(불선)를 축적하는 위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을 야기하는 아꾸살라를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담마를 배우는 목적, 즉 ‘자아에 대한 사견과 모든 오염원에의 매달림’을 없애는 지혜의 개발을 잊지 않을 것이다.
고찰한 바와 같이, 보시, 지계, 자애, 인내 또는 출리 등과 같은 선한 자질들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혜와 함께 무수한 겁 동안 개발되어야 하는 바라밀이다. 이 모든 선한 자질들은 그 목표가 오염원(번뇌)의 제거일 때에만 결국 깨달음으로 이끄는 바라밀이 된다. 단순히 목표에 대해 생각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바로 이 순간에 알아차려야 하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모든 종류의 꾸살라를 개발해야 한다. 이 순간에 사띠(알아차림)와 빤냐(지혜)가 있다면 아꾸살라는 유익하지 않음을 알게 되어 다른 종류의 꾸살라에 대한 조건이 됨을 알 수 있다.
아꾸살라는 사띠빳타나와 함께 교대로 일어날 수 있다. 아꾸살라가 일어날 때 그것을 자아가 아닌 조건지워진 나마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면 꾸살라 찟따가 있다. 의지대로 꾸살라 찟따를 일어나게 하는 자아는 없다. 어떤 단계의 꾸살라가 일어나도록 선택하는 자아도 없다.
꾸살라의 유익함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꾸살라가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보시의 유익함을 볼 수 있다. 타인에게 유용한 것을 선물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이득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사물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데 두어져야 한다. 우리의 목표가 오염원을 적게 하는데 두어졌을 때에만 보시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바라밀이 된다.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찟따(마음)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실재의 조건들을 무슨 목적으로 공부해야 하는가? ‘더 많은 선업과 이해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는 담마를 공부하는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아개념에 더 적게 집착하고 더 겸허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이라는 바라밀이 필요하고, 언제 꾸살라가 일어나고 언제 아꾸살라가 일어나는지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나타나는 서로 다른 실재에 대해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른 목적, 즉 ’사견과 나머지 오염원의 제거‘에 대한 확고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 진실과 결심이라는 바라밀은 다른 바라밀의 계발을 도운다. 모든 선한 자질들은 서로 조건이 된다.
조건법에 대한 공부를 통해 우리는 존재가 윤회를 계속하는 원인의 요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미혹함과 집착 때문에 삶은 재탄생의 원인이 제거될 때까지 계속된다. 윤회를 그치게 하는 자아는 없다. 재탄생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자아도 없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절망적이게 하지는 않는다. 담마를 듣고 그것을 숙고하게 될 때, 우리는 둑카(괴로움, 불만족)의 그침으로 이끄는 바른 조건을 계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상응부 경전(제5쌍윳따, 빅쿠니 셀라, No.9)에서, 우리는 다음 내용을 볼 수 있다.
사와티에서 악마가 빅쿠니 셀라(수행녀 셀라)에게 물었다.
“누가 이 인간이라는 환영을 만들었는가?
환영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환영은 어디에서 생겨 났는가?
환영은 어디에서 소멸되는가?“
셀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람이라는 환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이 재난은 타인이 만든 것도 아니니,
원인을 연유로 생겨 났다가
원인이 멸하면 사라져 버리네.
마치 어떤 씨앗이 밭에 뿌려져
흙의 자양분을 연유로 하고
습기를 조건으로 하여
이 두 가지로 성장하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과 구성요소,
또는 이들 감각영역들은
원인을 연유하여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 버리네.“
그러자, 악마는 ‘빅쿠니 셀라(수행녀 셀라)는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슬퍼하면서 거기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