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5.

12연기에 대한 법문 - 우 탄 다잉 12 연기와 위빠싸나 수행에 대하여

연기법 소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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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에 대한 법문 - 우 탄 다잉 12 연기와 위빠싸나 수행에 대하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asambuddhassa









존귀한 분, 공양 받을만한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모든 법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진리는 사성제(四聖諦. Catu Ariya Sacca)<*1>로써 이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붓다의 가르침이다. 사성제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2>의 도(道. Magga)와 과(果. Phala)<*3>는 우선 연기의 고리를 깨부숨으로써, 그리고 두 번째로 사성제의 완전한 이해와 실현을 통해서 만이 획득될 수 있다. 부처가 되기 전 위빠시 보살 (Vipassi Bodhisatta)<*4>께서는 끝에서 시작하여 처음으로 그리고 처음에서 끝으로 여러 번에 걸쳐 연기에 관해 깊고 진지하게 숙고하고 명상한 후에야 번뇌를 소멸시킨 지혜(漏盡智. Aasavakkhaya ~naa.na)의 꿰뚫는 지혜를 얻으시고 무지와 갈애를 완전히 벗어나 결국 궁극의 해탈을 얻으셨다.







우리에게 오신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5>께서도 이전 부처님의 족적을 따라 끝에서 처음으로 처음에서 끝으로 여러 번에 걸쳐 이 법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숙고하시고 명상하시어 결국 무지와 갈애에서 벗어나고 그 뿌리를 뽑아 마침내 땅이 흔들림과 같은 커다란 이변으로 예고된 깨달음의 경지를 얻으셨다.







-완벽한 법칙-







빨리어 경전인 삼장(三藏)안에는 비 불교 신자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몇몇 경이 있지만 진리의 법인 연기법은 어떠한 논쟁이나 비난 그리고 논란의 여지를 벗어나 있다.





빠타나[發趣論. Pa.t.thaana. 아비담마의 일곱째 권]가 이미 성스러운 길에 접어든 이들(아라한)에게 분석적 통찰의 획득을 위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듯 세속인들에게 있어서도 연기법은 여러 가지 사견(邪見. Di.t.thi)<*6> 즉 1)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 2) 상견(常見. Sassata-Di.t.thi), 3) 단견(斷見. Uccheda-Di.t.thi), 4) 무인론(無因論. Ahetuka Ditthi) 등을 제거함에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그릇된 견해의 제거는 수다원도(흐름을 이겨 아라한위로 가기 위한 첫 단계의 도)를 얻음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들 네 가지 사견들을 완전히 제거했을 때라야 범부가 다음 생에 사악도의 낮은 계(界. 영역)에 떨어질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제 수가띠[善趣. Sugati]<*7>로서 태어남을 받을 것이다.









연기법은 인과적 발생 혹은 재생 연결의 법칙 등으로 불리며, 세속인들이 그릇된 견해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악도로 떨어질 위험에서 마침내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하고자 부처께서 이 법을 자세히 설명하시었다. 이 법은 매순간 순간, 이것이 존재함으로 저것이 존재하게 되고 이것의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저것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진술은 아래와 같이 새롭게 표현할 수 있다.









A가 존재하므로 B가 존재하게 된다.



A가 일어나므로 B가 일어난다.



A가 멈춤으로 B가 멈추게 된다.









이것은 연기법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이 끝없이 일어남을 나타낸다. 이 법은 복합적이고 완벽하며 어떠한 분쟁이나 비판, 분란을 벗어나 있다.









- 연기법은 그릇된 견해에 맞서는 무기이다-





이 법은 오온의 원인과 그 인과작용에 대해 밝히고 설명해준다. 오온에 관한 지혜를 얻는 것은 수행자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며 이는 마치 초등학생이 곱셈과 나눗셈을 제대로 익히고자 한다면 2 x 2 = 4와 같은 구구단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습득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진정으로 도와 과를 얻고자 하는 수행자는 이 인과의 법칙을 우선적으로 습득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다양한 사견의 마수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이들 사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그는 결코 작은 수다원(Cuu.la Sotapanna)<*8> 조차 얻기 힘들 것이다.









물론 그는 마음과 몸에 관해 명상함으로써 이득을 얻겠지만 결코 도와 과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견들이 도와 과를 향한 길에 주된 장애물과 방해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 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연기법의 완전한 이해 없이는 해탈을 향한 어떠한 단계에도 이를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히셨다.





'Thapetvaa pana dwe Bodhissatta an.no satto attano dhammataaya



Paccaya-karam ujumkaatum samattonaama natthi



Evamayan loko paccyakaram



ujumkaatum asakkonto Dvasathiditthi gata vasena



ghandhijaato hutva



apaayam duggati vipatam samsaaram nativattati'









위 글은 두 부처 위(부처와 벽지불)에 이른 이를 제외한 누구도 혼자만의 힘으로 연기법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우며 속인들은 마치 엉클어진 실타래와 같은 62가지의 사견에 사로잡혀 윤회의 불행하고 파괴적인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 버마와 연기법-





과거에 이 법은 인연품(因緣品. Nidaana Vagga Samyutta)과, 대품(大品. Mahaa Vagga), 그리고 아비담마의 위방가(分別論. Vibha!nga) 등과 같은 빨리어 원전으로만 접할 수 있었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 법은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 Magga)과 아비담마의 분별론 주석서(分別論 註釋書. Sammohavinodani)에서 자세히 다루어졌다. 청정도론의 번역은 아와(Ava)시대 초에 이루어진 반면 후자는 아마라뿌라(Amarapura)시대에 와서야 이루어 졌다. 이들 경전은 대부분 승려들이었던 빨리어 학생을 제외하고는 이해하기 곤란할 뿐만 아니라 야자수 잎에 쓰여 졌기 때문에 쉽게 접하기에도 힘든 상태가 되어 사원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마치 부처의 이미지인양 안치되고 받들어 졌다.







사실상 빨리어로 된 아위자 빠짜야 상카라[無明緣行. Avijjaa Paccaya Sa!nkhaaraa. 무명을 원인으로 한 행] 등의 구절은 대다수의 남녀 불자들이 외워 모든 사원에서 예불기간 동안 아침저녁으로 매일 암송하고 있지만 그 진정한 가치나 법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에 관한 한 바간(Bagan)시대 이래 지금까지 불교국인 미얀마의 실상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일부 예외는 있었지만 이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속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법하고 주해서를 써서 연기법을 전면에 부각시킨 이가 바로 대 장로 레디 사야도(Maha Thera Ledi Sayadaw)이시다. 그분이 끼친 영향은 지대해서 연기법의 중요성과 본질이 점차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인식되어 가기 시작했다. 고(故) 대 장로 레디 사야도께서는 50권이 넘는 주해서를 집필하셨고 그 대부분 글을 연기법에 대해 설하셨다.







전후 독립 미얀마의 붓다의 가르침 협의회(Buddha Sasana council) 덕분에 빨리 경전의 버마어 번역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번역으로 인해 엄청난 이득이 있었다.







수많은 위빠싸나 명상센터가 설립되었고 이에 관심을 갖는 이들의 수도 나날이 늘어만 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센터가 부분적인 견해를 견지해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법만을 취함으로써 위빠싸나의 핵심인 대념처경[身, 受, 心, 法]의 일어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놓치는 점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두 법인 사성제와 연기법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음, 즉 이들 명상센터에서 이에 대한 가르침이나 단 한번의 거론됨이 없다는 것 또한 유감스럽다.







우선적으로 사견과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연기법을, 그리고 도와 과를 실현하기 위해 사성제에 대해 가르쳐야 할 적합한 장소에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애석한 일이다.







이들 부처의 두 가지 핵심적 가르침이 우려스럽게도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이를 위해 저자가 최선을 다해 강조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대부분의 명상센터에서 유행중인 방법은 수식관(隨息觀. Aanaapaanasati)<*9>에 의해 얻어진 집중[定. 三昧. Samaadhi]<*10>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사마타[禪定. Samatha]<*11> 수행법에 근접해 있다는 점이다.







이들 센터의 수행인들이 수식관에 의해 얻어진 마음집중 수행을 순수한 위빠싸나 방식으로 올바르게 전환해 가도록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몹시 애석한 일이다.







이미 거론한 바와 같이 일반인들 사이에 연기법이 유명해지도록 만든 이는 대 장로 레디 사야도(Maha Thera Ledi Sayadaw) 이시다. 레디 사야도 이후에 연기법을 재 부각 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견의 제거에 있어서 기반이 되는 이 법의 중요성과 위대성을 강조한 이가 대 장로 모곡 사야도(Maha Thera Mogok Sayadaw) 이시다. 그는 직접 고안하고 소개한 도표를 통해 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편리한 스타일로 연기의 진행됨과 그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셨다.









잠시 그분의 일생을 소개하겠다. 대 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만달레이(Manadalay)에서 7마일 가량 떨어진 아마라뿌라(Amarapura)의 민구라 따익(Mingula Taik) 사원에서 30년 이상 승려들에게 아비담바[論藏] 야간반 강의를 해 오셨다.







그분께서 저자에게 말씀하시길 어느 날, 자신은 소를 몰고 감에도 한번도 소에서 짠 우유를 마셔보지 못한 목동과도 같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분은 당시 삼장 중에 아비담마의 발취론(發趣論. Pathaana)과 쌍론(雙論. Yamaka)을 가르치던 가장 인기 있는 강사이셨고 승려들 사이에서는 많은 존경을 받았으나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그분께서는 이차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머물러 위빠싸나 수행을 하시던 만달레이를 떠나 반대편의 민군(Mingun)을 향했다. 모곡 수행인들은 그분께서 상주하시기를 원했지만 사야도께서는 모곡에 항상 거주하시지는 않고 추운 계절에는 아마라뿌라로 가시고 여름에는 모곡으로 다시 돌아 오셨다.





전후 이후 사야도께서는 아마라뿌라와 모곡 그리고 만년에는 만달레이에서도 위빠싸나 강의를 시작하셨다. 그분은 명성을 멀리 하여 신도들의 수를 늘이고자 애쓰지 않으셨다. 단 한번 랑군(버마 수도)을 방문하셨으며 방문 3개월 후 아마라뿌라에서 입적하셨다. 그분은 아라한으로 믿어졌으며 입적 후 다비 시에 나온 사리의 모습을 통해 그것이 증명되었다.(다비 시 불탄 뼈는 다양한 크기의 하얗고 둥근 구형의 사리로 바뀌었다. 가장 놀라운 일은 양쪽 눈의 눈동자가 화염 속에서도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었다.) 장례행사는 근래 백 년 동안 비견할 바가 없이 화려하고 장엄하게 치러졌다. 그분의 가심은 대체할 수 없는 큰 손실이었다.





사야도께서 도입하고 가르치신 방법은 엄밀한 의미의 사념처(四念處. satipa.t.thaana)와 수많은 경(經. Sutta), 쌍윳따 니까야[相應部. Sa!myutta-Nikaaya]와 안구따라 니까야[增支部. A!nguttara-Nikaaya]와 사성제(四聖諦. Ariya Saccaa) 등의 경전과 모순 됨이 없다. 그분은 가르침을 펴셨을 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내려온 깊이 뿌리박힌 그릇된 개념과 생각을 설명하고, 바로 잡고 개조하는 역할까지 다 하셨다.







염처경의 사성제부(四聖諦部. Saccaa Pabba)를 포함한 모든 장에는 위빠싸나의 핵심이 거론되고 있다.







'Samudaya Dhammaa Nupassivaa Vihaarati,



Vaya dhammaa nypassivaa vihaarati,



Samudaya Vayadhammaa nupassivaa vihaarati'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수행자는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며 머물러야 한다.’이다. 이것이 바로 위빠싸나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위빠싸나라고 할 수가 없다. 또한 이 부분이야말로 위빠싸나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부분이며 정수이다. 사념처(四念處. satipa.t.thaana)의 이러한 면이 거의 간과되었으며 모든 센터에서 애석하게도 무시되고 있다.







수식관은 어린 아이들 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매우 잘 알려진 방법이며 두 번째로 알려진 방법은 행주좌와(行住坐臥. 가고, 서고, 앉고, 눕고)의 방법이다. 수행자 중에서도 많은 이가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수식관이나 행주좌와에 대한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이 있더라도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기 전에는 즉 달리 말하자면 수행자가 수관(隨觀. Anupassanaa)<*12>을 닦고 있지 않다면 이는 여전히 사마타일 뿐이지 위빠싸나가 아니다. 그가 지혜를 가지고 매분, 매초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본성을 보려고 애쓸 때만이 그는 진정으로 위빠싸나 명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발생(發生. Uppaada)과 소멸(消滅. Vaya) 혹은 일어남(Samudaya)과 사라짐(Vaya) 즉 생멸(生滅)은 붓다께서 가르치신 수관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이 생멸의 진정한 핵심은 사념처 수행과 수식관에 의한 삼매에 의해 상당 부분 불분명함 속에 가려져 버렸다.





대 장로께서는 만년의 대부분을 위빠싸나를 통해 재가자들을 붓다의 진정하고 순수한 가르침의 길로 인도하려고 애쓰셨다.





사실상 위대한 스승이신 붓다의 고귀한 가르침이 탄트라(Tantric), 만트라(Mantric. 진언, 주문), 신비주의(Mysticism), 정령설(Animism. 목석 따위에도 생물과 같이 영혼이 있다고 하는 설), 브라마니즘(Brahmanism. 고대 인도의 경전 베다에 중심을 둔 바라문교) 등의 수많은 주의 주장들의 영향을 받게 된 바와 같이 미얀마의 불교 또한 버마식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상생활 속에 많은 버마 불자들은 명상법에 적용된 상견(常見)의 소용돌이에 빠져 진정하고 순수한 위빠싸나와는 거리가 먼 수식관의 알아차림에 대한 집중수행으로 반쯤은 길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고(故) 대 장로 모곡 사야도의 목표는 이러한 비불교적인 관점을 바로 잡고 개혁하며 잘못 이해된 견해들과, 주고받는 식의 잘못 인도된 보시의 의도(意圖)<*주13>등을 지적하고 올바른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이로운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일어남과 사라짐에 관한 명상[無常觀. Aniccanupassanaa]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들이쉼과 내쉼의 단순한 연습을 통해서는 순차적으로 진리를 아는 지혜[諦隋順智. saccaanulomika ~naa.na] 조차 얻기에도 부족하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몸과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관해 지켜보거나 명상함이 없이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단순히 알아차리는 것은 단순한 상(想. Sa~n~na)일 뿐이다.





대 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일어남과 사라짐[無常, 苦, 無我]을 상당히 강조하셨다. 명상 수행이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집중되어 있을 때라야 백 퍼센트 온전한 위빠싸나라고 불릴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명상 수행이 없을 때 이는 백퍼센트 온전한 위빠싸나 수행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사념처(四念處. Satipa.t.thaana)를 얘기할 때 설명했듯이 생과 멸을 보지 않고는 불완전하고 미숙할 뿐이다.





모곡 위빠싸나 보급회의 목적과 그 지향하는 바는 두개의 주요한 법인 사성제와 연기법을 활성화시키고 널리 알리는 것이다.





맺음을 하기에 앞서 저자는 원본을 읽고 교정을 봐주신 존경하는 아가마하빤디따(Aggamahaapandita)<*15> 우 티띨라 사야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사실상 사야도께서 원본과 최종 교정본을 봐주심으로 빨리어의 영어 철자가 실수 없이 실릴 수 있었고 그 의미도 무리 없이 전달될 수 있었다.





1967년 9월 11일



버마 랑군



우 탄 다잉(U Than Daing)



모곡 위빠싸나 보급회 회장





....................





주해(註解)





<*주1> 사성제(四聖諦. Catu Ariya Sacca) :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한다. 사성제는 성인(聖人. Ariya)이 되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진리이다. 빨리어 사짜(Sacca)는 진리를 말하는데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의미한다.









1) 고(苦. Dukkha) - 불만족, 참기 어려운 것 등의 의미가 있으며 괴로움은 있다.



2) 집(集. Samudaya) - 고의 발생의 원인이 갈애로 인한 집착이다.



3) 멸(滅. Nirodha) - 고의 소멸인데 이는 닙바나(열반)에 의해서 소멸된다.



4) 도(道. Magga) -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8정도를 말한다.









<*2>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 성인(聖人. Ariya)이 된 네 가지 위(位)를 말한다.





1) 수다원(須陀洹. Sotaapatti) - 도(道)의 흐름에 든 것으로 예류과(預流果)에 이른 것을 말한다. 수다원이 되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된다.



2) 사다함(斯多含. Sakadaagaami) - 한 번 더 생을 받아 오는 것으로 일래과(一來果)라고 한다. 인간으로 한번 태어나서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된다.



3) 아나함(阿那含. Anaagaami) -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천상의 정거천에서 태어난 뒤에 아라한이 된다. 그래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불환과(不還果)라고 한다.



4) 아라한(阿羅漢. Arahatta) -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공양을 자격이 있는 분으로 응공(應供)이라고 한다.





<*3> 도(道. Magga)와 과(果. Phala) : 성인의 4위(四位)에 오르기 위해서는 각 단계에서 도와 과의 과정을 거친다. 도(道)는 지향하는 것을 말하며 과(果)는 결과에 이른 것을 말한다.





도와 과는 성인의 4도(四道)와 4과(四果)가 있다.



1) 수다원의 도(道)와 과(果)



2) 사다함의 도(道)와 과(果)



3) 아나함의 도(道)와 과(果)



4) 아라한의 도(道)와 과(果)



이상의 4위와 여덟 가지 도와 과를 사쌍팔배(四雙八輩)라고 한다.





<*4> 위빠시 보살(Vipassi Bodhisatta) : 빨리어 보디사따(Bodhisatta)는 깨달음을 구하는 자를 말하며 이를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바라밀을 쌓는 구도자를 말한다.







위빠시 보살(Vipassi Bodhisatta)은 4부(四部) 니까야(部集. Nikaaya)에서 나타나는 일곱 분의 붓다 중에서 처음 부처가 되신 위빠시 붓다(Vipassi Buddha)의 전신이시다. 일곱 분의 부처님[七佛]께서는 모두 12연기와 사성제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신다. 일곱 분의 부처님이 모두 사념처 위빠싸나 수행을 통하여 도과에 이르신다.







<*5>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 : 고따마 붓다의 성은 사끼야[釋迦. Saakiya]이고 이름은 싯닷타(Siddhattha)이다. 고따마(Gotama)는 사끼야족의 남자를 부를 때 사용하며 여자는 고따미(Gotami)로 부른다. 싯닷타는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석가족 출신에 대한 부처님의 다른 이름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기록된 4부 니까야에서는 붓다가 일곱 분[七佛]으로 기록되었다. 이 칠불 중에 마지막 붓다가 고따마 붓다이시다. 그러나 소부아함(小部阿含) 중의 하나인 붓다왐사[佛種姓經. Buddhava!msa]에서는 전체 부처가 25불이 되신다. 이 분들 중 마지막 일곱 분의 붓다가 칠불이시다.







25불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Diip!nkarabuddhava.mso



2. Ko.n.da~n~nabuddhava.mso



3. Ma!ngalabuddhava.mso



4. Sumanabuddhava.mso



5. Revatabuddhava.mso



6. Sobhitabuddhava.mso



7. Anomadassibuddhava.mso



8. Padumabuddhava.mso



9. Naaradabuddhava.mso



10. Padumuttarabuddhava.mso



11. Sumedhabuddhava.mso



12. Sujaatabuddhava.mso



13. Piyadassibuddhava.mso



14. Atthadassibuddhava.mso



15. Dhammadassibuddhava.mso



16. Siddhatthabuddhava.mso



17. Tissabuddhava.mso



18. Phussabuddhava.mso



19. Vipassibuddhava.mso



20. Sikhiibuddhava.mso



21. Vessabhuubuddhava.mso



22. Kakusandhabuddhava.mso



23. Ko.naagamanabuddhava.mso



24. Kassapabuddhava.mso



25. Gotamabuddhava.mso





<*6> 사견(邪見. Di.t.thi) : 사견(邪見)은 잘못된 견해, 삿된 견해를 말한다.



본문에서는 사견을 다음 네 가지로 말하고 있다.



1)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 - 유신견은 개아(個我)라고 하는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므로 인상, 아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견해는 청정하지 못한 견해에 속한다.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자아는 조건지어진 물질과 정신만이 있는 것이다.



2) 상견(常見. Sassata-Di.t.thi) - 존재에 대한 갈애로써 자아라는 실체, 또는 영혼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3) 단견(斷見. Uccheda-Di.t.thi) - 비존재에 대한 갈애로써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삶이 끝나기를 갈망한다.



4) 무인론(無因論. Ahetuka Ditthi) -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가 없고, 조건지어진 것을 인정하지 않는 믿음이다.







<*7> 수가띠[善趣. Sugati] : 네 가지 사견이 제거되면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를 선취(善趣), 또는 선도(善道)라고 하는데 앞으로 일곱 생의 윤회만 남은 행복의 단계를 말한다. 선취는 천(天)과 인(人)을 의미하는데 일곱 생 동안 사람이나 천상에 태어나고 사악도에는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8> 작은 수다원(Cuu.la Sotaapanna) : 빨리어 쭐라(Cuu.la)는 작은 이라는 말로써 작은 수다원은 아직 수다원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수다원의 도과에 이르는 지혜를 얻은 사람을 말한다. 수행자가 네 가지 사견이 제거되고 나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되면 작은 수다원이라고 부르게 된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은 12연기법을 아는 것으로 인과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게 된 것을 말한다.





<*9> 수식관(隨息觀. Aanaapaanasati) :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말하는 것으로 코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주시하는 수행방법이다. 이것을 수식관(數息觀)이라고도 한다.





사념처 위빠싸나에서 신념처 수행을 할 때는 먼저 몸의 호흡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한다. 이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대상이 코의 호흡이다. 그러나 지도자에 따라 호흡을 알아차리는 위치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호흡의 위치는 방법상의 문제이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하시 센터 방식은 배의 움직임을 선호하며 쉐우민 센터에서는 호흡의 위치가 자유로우며 코나 가슴이나 배나 느껴지는 곳에서 알아차린다. 그러나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는 전면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므로 몸의 특정한 위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현재 미얀마에서 사마타 수행을 하는 곳에서는 일정기간 코의 호흡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고 나서 위빠싸나로 전환하고 있다.







<*10> 집중[定. 三昧. Samaadhi] : 집중을 사마디(Samaadhi)라고 한다. 또는 삼매라고도 말한다. 사마디는 청정한 마음에 의한 집중을 말한다. 그러므로 집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고요함이 있어야 하고 이어 마음이 청정해진 뒤에 대상에 조용하게 머무는 것을 말한다.





수행에서 집중의 의미는 매우 크다. 팔정도인 계정혜 삼학에서 계율을 지켜 대상을 알아차리면 정(定)이 생기고 다시 지혜로 발전한다. 이때의 정(定)이 바로 집중을 의미한다. 그래서 집중은 지혜의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행의 일차적인 목표가 되기도 한다.





집중(Samaadhi)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근본정(根本定. Appanaa Samaadhi) - 깊은 삼매, 안지정(安止定)이라고도 한다.



2) 근행정(近行定. Upacaara Samaadhi) - 초기 삼매, 근행에 대한 집중이라고도 한다.



3) 찰나정(刹那定. Kha.nika Samadhi) - 찰나 삼매, 순간적 삼매라고도 한다.





이상의 집중에서 근행정은 근본정에 이르기 위한 전 단계로써의 집중을 의미하며 사마타 수행에서 필요로 하는 집중이다. 위빠싸나 수행에서 사용하는 집중은 찰나정이다.





<*11> 사마타[禪定. Samatha] : 사마타는 위빠싸나와 함께 수행을 양분하는 수행방법의 하나이다. 이 두 가지 수행방법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관계가 깊다. 사마타(Samatha)의 뜻은 평온, 멈춤[止], 적지(寂止)라고도 하는데 고요함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사마타 방법으로 하는 수행을 선정이라고 한다. 붓다가 위빠싸나로 깨달음을 얻으시기 전에 수행자가 할 수 있는 수행방법은 사마타 밖에 없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초기 삼매와 깊은 삼매를 사용하며 고요함에 머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사마타 수행은 청정도론에서 40가지의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마타 수행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위빠싸나와 함께 필요로 하는 수행방법이다.





사마타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위빠싸나는 지혜를 얻는 수행으로 두 가지 수행방법을 활용하여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순수 위빠싸나에서는 사마타를 사용하지 않고 위빠싸나만으로 수행을 하기도 한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은 고유한 특성이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하며 위빠싸나 수행은 몸과 마음의 실재하는 고유한 특성을 대상으로 한다.





사마타에서 생기는 집중력을 ‘사마디 마음’이라고 하며 이때 생기는 지혜를 ‘사마디 지혜’라고 한다. 또한 사마타로 생기는 알아차림을 ‘사마디 알아차림’이라고 한다. 위빠싸나에서는 알아차림으로 지혜를 얻는데 이것을 ‘위빠싸나 지혜’라고 말한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먼저 사마디를 얻고 나서 ‘사마타 지혜’가 온다. 그러나 위빠싸나에서는 먼저 지혜를 얻은 뒤에 믿음, 노력, 집중이 뒤따른다.





<*12> 수관(隨觀. Anupassanaa) : 빨리어 아누빠싸나(Anupassanaa)는 응시, 관찰(觀察), 수관(隨觀)을 말한다. 이때 수관(隨觀)은 뒤따라가며 알아차린다는 의미보다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 또는 계속해서 관찰을 하는 것, 반복적으로 관찰을 하는 것이란 의미를 가진다. 한문에서 말하는 수관(隨觀)을 잘못 이해할 경우에는 대상이 일어나고 뒤따라서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의 일어남과 알아차림은 한순간에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누빠싸나(Anupassanaa)는 대상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13> 잘못 인도된 보시의 의도(意圖) : 이 부분은 선한 행위인 보시와 계를 지킴 등이 다음 생에서의 보다 높은 지위(천상의 왕 등)를 얻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행해짐을 의미한다.





수행자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유신견, 상견, 단견 등의 사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는 위빠싸나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냐따 빠린냐(知遍知. ~naata Pari~n~naa)<*주14>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주14> 냐따 빠린냐[知遍知. ~naata Pari~n~naa]는 반드시 띠란나 빠린냐[度遍知. Tira.na Pari~n~naa] 전에 온다. 즉 위빠싸나 명상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반드시 첫 번째에 나타나고 그 다음에야 두 번째 단계가 나타난다. 이는 수행하고자 하는 이는 오온과 입처, 사성제와 연기법 등을 상당 부분 이해하고 그의 견해가(믿을만한 위빠싸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어느 정도 바람직하지 못한 견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서 실 수행을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사견의 제거는 삼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단계는 믿을만한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다. 이것이 냐따 빠린냐[知遍知. ~naata Pari~n~naa]이다. 둘째 단계는 실 수행에 들어감이다. 이것이 띠란나 빠린냐[度遍知. Tira.na Pari~n~naa)이다. 다음으로 마지막 단계는 완전히 뿌리 뽑음이다. 이것이 빠아나 빠린냐[斷遍知. Pahaana Pari~n~naa]이다. 이것은 번뇌를 끊어 버림에 대한 완전한 지혜이다. 다시 빠아나 빠린냐는 확실히 버림(Tada!nga Pahaana)과, 누름에 의해 버림(Vikkhambhana Pahaan)과, 속박의 단절에 의해 버림(Samuccheda Pahaana)이 있다.





1) 냐따 빠린냐[知遍知. ~naata Pari~n~naa] - 알아야 할 것을 완전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2) 띠란나 빠린냐[度遍知. Tira.na Pari~n~naa] - 건너야 할 것을 완전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완전한 지혜의 측정을 의미한다.



3) 빠아나 빠린냐[斷遍知. Pahaana Pari~n~naa] - 번뇌를 끊어버리는 것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말한다.





빠아나 빠린냐[斷遍知. Pahaana Pari~n~naa]는 세 가지가 있다.



① 확실하게 버림(Tada!nga Pahaana), 또는 확실하게 제거함.



② 억제에 의해 버림(Vikkhambhana Pahaana), 또는 누름에 의해 제거함.



③ 속박의 단절에 의해 버림(Samuccheda Pahaana), 또는 족쇄의 단절에 의해 제거함.





<*15> 아가마하빤디따(Aggamahaapandita) : 큰 스승에게 드리는 호칭. 최고의 현자에게 올리는 존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