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4.

금강경 대강좌-5- 妙行無住分-청담스님

妙行無住分 第四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菩薩(보살)이 於法(어법)에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行於布施(행어보시)니 所謂不住色布施(소위부주색보시)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부주성향미촉법보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하되 不住於相(부주어상)이니 何以故(하이고)오 若菩薩(약보살)이 不住相布施(부주상보시)하면 其福德(기복덕)을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東方虛空(동방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不也(불야)니이라 世尊(세존)하 須菩提(수보리)야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의 無住相布施福德(무주상보시복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 또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빛이나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말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만일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수보리야, 남쪽 . 서쪽 . 북쪽과 네 간방과 아래위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수보리야, 보살이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그대로 머물지니라.』



第四 妙行無住分--머무름 없이 행하라



[科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란 불교의 오묘한 법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묘행(妙行)은 수행(修行)한다는 말이고, 무주는 마음을 닦을 때 어떤 조건 어떤 법에도 머물러서 집착하고 걸리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대승의 진리인데 세 번째로 묘행 무주의 도리를 말한다고 해서 제 사분(第四分)이라 한 것인데 그 내용의 요의(要義)를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깨쳐서 성불(成佛)하고서야 비로소 생사를 초월한 것이 아니고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당 지옥(天堂 地獄)의 윤회(輪廻)를 하고 돌아다니며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갖가지 몸뚱이를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기도 했지만 이 마음만은 문둥이도 아니고 재주 있는 것도 아니고 질량(質量)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계(現象界)에 걸릴 것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學問) . 지식(知識) . 돈 . 권력(權力) . 육체 생활(肉體生活)등에 얽매어 아무리 애써서 죽도록 해봐도 죽음 앞에 다다르면 다 헛것입니다. 온 세계 권력을 가지고 세계 돈 다 모아 봐도, 또 도서관(圖書館)의 지식 다 알아봐도 제일 큰 인생 문제(人生問題)인 죽음만은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 밥 세 그릇 때문에 「밥 못 먹으면 죽는다. 육체가 죽으면 내가 죽는다.」고 착각(錯覺)을 하여 가지고 「하루 밥 세 그릇 가운데 한 그릇이라도 못 먹으면 영원히 못 먹는다 죽은 뒤에라도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보살은 이런 마음을 다 쉬라는 것입니다. 세 그릇 먹든 거 두 그릇 먹고 나머지 한 그릇 배고픈 사람 주자, 배고픈 사람 배를 채워 주었으니 복이 되고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 . 생명, 이것을 찾아 우주에 자유해 보자, 그래서 생사(生死)도 없어지고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오직 남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면 이익 되고 저걸 버리면 손해가 클 테니 절대로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하는 등의 망상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지니기 때문에 소위 업(業)이란 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살은 보고 듣는 거 꼭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심(無心)이 되어 생각이 없으면 하루 종일 다녀도 남과 싸우거나 장난을 하거나 하나도 마음에 남지를 않습니다. 어제 내가 저물도록 얘기해 놓고도 오늘 만나면 또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재미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업(業)이 녹는 것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첫 구절(句節)에 나오는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란 말은 비록 팔만 사천 계율(八萬四千 戒律)을 다 지키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지만 그런 모든 걸 다 마음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 「농사를 뼈 빠지게 짓더라도 그 농사지어 뭘하겠다는 생각 버리고 그냥 농사만 지어라 장사를 해도 이 돈 벌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아무 잡념(雜念) 없이 뼈빠지게 하라, 그래서 아껴 먹고 남는 것은 없는 사람에게 몽땅 다 베풀어 줘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보살의 보시하는 마음씨와 그 공덕(功德)을 말씀한 것이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입니다.





原 文 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 에게 거듭 말씀하시기를 「또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어떤 법에든지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應無所住 行於布施) 하심은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내 것을 주고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기분 내지 말고 사회봉사(社會奉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했다 해도 말이 안되고 안 했다 해도 말이 안되고 그저 중생을 위해서 노력한 것뿐입니다. 중생(衆生)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해서 잘 했다는 서투른 생각을 할 수도 없으니 자연히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성인(聖人)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법(於法)이라 함은 모든 법이란 뜻이니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 어떤 환경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그런 말입니다. 남자 건 여 자건 노인이건 젊은 이건 한국 사람 외국 사람을 가릴 것 없이 다 잘 살게 해 주고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해 주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 한 방울만 떠 주어도 은혜(恩惠)를 베풀어주었다 하여 공치사(功致辭)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굴레에다가 뒤집어 씌워서 구속을 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본래 있으니까 나를 준 것이지 네것을 주었느냐.」 하고 감정적(感情的)으로 말을 해도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러니저러니 하고 시비(是非)가 분분(紛紛)해집니다. 그래서 생사 번뇌(生死煩惱)가 질펀하게 벌어져서 고통(苦痛)의 세계가 됩니다. 그러니 무신경(無神經)이 되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면서 남을 도와주기도 하고 남에게 받기도 하고 해야 합니다.

보시(布施)에 대해서 시수물삼륜(施受物三輪)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해야 합니다. 출가(出家)해서 처음 절에 들어가면 이것부터 배웁니다. 곧 수레는 여기 있는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는 도구(道具)로서 세 가지 바퀴는 첫째 시륜(施輪) . 수륜(受輪) . 물륜(物輪)의 셋입니다. 시륜(施輪)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뜻하고 수륜(受輪)은 주는 물건 받는 것을 뜻하고 물륜(物輪)은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받는 돈이나 밥이나 물건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건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본래 면목(本來面目)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함을 알아서 주고받는 자리가 없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빚 갚을 사람이 생기고 빚 받을 사람이 생깁니다. 땅 위에 공공연(公公然)히 있는 물건을 도둑질해서 이쪽 물건을 저쪽으로 옮긴 것 뿐 이니, 주는 생각 없이 주어야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내것을 남에게 주었거니 하고 생각하면 이것이 지옥 갈 시초(始初)가 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도 아무 게한테 무엇을 받았으니 큰 빚을 졌구나 하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보다 더 급한 사람 있으면 생각 없이 또 주기도 합니다. 은혜를 졌다 해서 고맙다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받으면 이 사람은 물건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야 수륜이 청정한 것입니다(受輪淸淨).

천지(天地)에 공공연하게 있는 땅을 마음대로 금을 그어 놓고 압록강(鴨綠江) 이쪽은 중국 땅이니 못 온다 하여 국경(國境)을 만들고, 물건은 아무개 것이라고 소유권(所有權)을 인정하며, 농사를 지어 추수(秋收)해 자기 집 곳간에 쌓아 두고는 이것은 내것이니 아무도 가져가지 말라 합니다. 이런 것이 다 잘못이고 중생살이입니다. 그러지 말고 입 있는 사람 배고픈 사람 다 오라고 해서 농사를 지어야 바로 하는 농사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잘못된 근본 생각이고 생사를 윤회(輪廻)하게 된 근본 착각(錯覺)입니다. 나를 내 세워서 소유권(所有權) 행사를 하려 하고 끝없는 욕심(慾心)을 내어 점령(占領)하려는 착각(錯覺)이 삼차전쟁(三次戰爭)을 일으키려는 근본망상(根本妄想)입니다. 천지(天地)에 공공연히 있는 청정한 물건을 아무 윤리(倫理)도 도덕(道德)도 없이 대포알이 한 개만 더 있어도 먼저 기습해서 점령하려고 하니 모두가 도둑의 심보입니다.

그러므로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한 도리를 잘 배워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상 없는 무상(無相) 무소주(無所住)로 아무 생각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청정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첫째 나부터 내 가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나절 일해 주고 밥만 한 그릇 달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시킬 겁니다. 옷은 쓰레기통에서 주어 깨끗이 빨아 꿰매 입을 요량(料量)하면 됩니다. 이것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를 배우는 태도입니다.





原 文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解 義 남을 위해서 보시(布施)하는 데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지식보시(知識布施)이고 돈이나 재물(財物)을 보시하는 재보시(財布施),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외로울 때, 도와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시를 함에 있어서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조건 없이 불교의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보시(法布施), 재물로 남을 구제해 주는 재보시(財布施), 외로움 두려움을 보살펴 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의 보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눈으로 보아서 보기 좋은 것은 좋다고 집착하고, 더럽고 거칠면 싫다고 미워하여 좋아하는데 집착하든지 싫은데 집착하든지 합니다. 미인(美人)은 좋아하고 추녀(醜女)는 싫어하며 집도 크고 아름답게 지었으면 좋다고 집착하고 모양 없이 지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은 추하여 싫다는 생각에 집착됩니다. 이와 같이 눈을 통해서 집착될 수 있는 객관(客觀) . 시각(視覺)의 대상(對象)으로 받아들이는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여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쓰는 빛색자(色)는 빛깔이나 물질의 모양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객관을 뜻하는 글자이니 부주색(不住色)이란 말은 곧 눈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聲)나 코로 맡는 향기(香)나 혀로 아는 맛(味)이나 몸으로 아는 촉감(觸)이나 어떤 사상 . 지식 . 도덕 . 윤리 . 신앙 . 종교 등의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성악(聲樂)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나는 성대(聲帶)가 좋다 학급에서는 내가 제일이다.」하는 자존심(自尊心) . 아만심(我慢心)을 가지고 남에게 노래를 들려주려면 잘 안 됩니다. 또 말을 잘한다고 해서 청중(聽衆)을 무시(無視)하고 강연(講演)을 해도 그것은 안 됩니다. 더구나 불법(佛法)을 설명하는 법사로서 「나 같은 법사 또 있을 수가 있나, 나 말고는 법사가 또 없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큰 탈입니다. 아상(我相)이 꽉 차서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 밑에 마당가에서나 설법을 하는 사람이지 방안에서 올바른 설법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가 좋다든지 말을 잘 한다든지 하는 등의 소리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不住聲布施).

또 의복(衣服)을 한다던가, 아들을 처녀한테 장가를 보낸다던가, 자기 딸을 어떤 총각한테 시집 보낸다던가 하는 것을 다 보시(布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좋은 촉(觸)을 수용(受用)하도록 해 준다는 뜻입니다(不住觸布施). 또 일체 만법(萬法)을 다 설명해서 세상 지식을 다 알고 불법도 다 알아 이런 것을 다 이해시켜 주지만 그 진리가 꼭 이런 것이라는 결정적인 고집(固執)을 버리고 그런 생각에 머물지 말고 가르쳐 주고 보시해 주라는 것입니다(不住法布施).



原 文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解 義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를 해석할 때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기는 경우와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 고 풀이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의 해석은「보시하라」는 뜻이 있지만 뒤의 해석은 「보시하지 말라」는 뜻이 되므로 뒤의 해석에 따르면 중생을 제도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고 불법도 전할 자비심이 없는 독성나한(獨聖羅漢)이 되어 소승불교(小乘佛敎)에 가깝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證得)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불과(不果)를 증득하지 못 하게 됩니다.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해석해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되고 잘했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까지 버리고 설명하는 동시에 「발심(發心)하라, 일일이 활동하라, 생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인 대승심(大乘心)을 가지고 대승행(大乘行)을 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 앞에서처럼 새기면 소승이고 뒤의 해석대로 새기면 대승이 된다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새기든지 뜻은 바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는 말도 곧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고집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하므로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경문(경문)을 계속해서 새겨 봄으로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빽빽이(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수菩提菩薩應如是布施不住於相)」「이와 같이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한 말씀이 분명히 있으니 앞의 구절도(句節)도 <보시하라>는 뜻으로 긍정적(肯定的)인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原 文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만일 보살이(若菩薩) 상에 머물지 않고, 객관의 현상에 대해 아무 욕심이 없이 집착하지 않고 남을 위해 도와주고 보시하면(不住相布施), 그 복과 덕이 한량없이 많기 때문이니라(其福德不可思量) 하셨는데, 가령 농사(農事)를 짓되 추수(秋收)를 해서 내 곳간에만 쌓아 두지 말고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 있으면 먼저 먹으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마침내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없어지고 정말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 버립니다.

금강경이 상하권(上下卷) 두 권인데 이 금강경만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경보는 힘이 생겨서 다른 경전(經典)을 볼 때에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경보는 눈이 열렸다고 하여 경안(經眼)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장가들면 신랑 노릇 잘 할 수 있고 시집가도 요조숙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라에는 충신(忠臣)이 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게 됩니다. 금강경의 도리로 무심하게 아무 생각 없이 상대를 위해서 봉사했기 때문이고 나 없는 마음으로 인아산(人我山)을 부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에 그 복덕이 한량없어서 헤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므로 이 한 몸을 다 바쳐서 하나뿐 아니라 열 백 천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위해 보시할 수 있고, 생각 없이 하므로 상대의 뜻에 맞추어서 남을 가장 잘 위하는 방법으로 온 정성을 다 해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말씀을 해설해 주고 육신이 내가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갖 보살행(菩薩行)을 할뿐이므로 그 복덕이 한량없다고 한 것입니다.





原 文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

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 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解 義 부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하는 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허공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허공이 얼마나 되겠느냐. 허공의 끝이 있겠느냐(東方虛空 可思量不).」하고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허공은 제일 큰 공간(空間)이어서 그 크기가 무한대(無限大)입니다.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無限)이니 동쪽의 허공도 무한이고 서쪽의 허공도, 남쪽의 허공도, 북쪽의 허공도 무한입니다. 동남 . 서남 . 동북 . 서북 . 의 간방(間方)도 그렇고 상하(上下) 아래위의 공간도 무한하여 끝이 간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방팔방만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렇게 평면적인 공간세계만을 말하지 않고 방위(方位)를 말할 때에도 입체적으로 생각하여 동서남북의 사방과 四간방(間方)에다 상하방(上下方)을 합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말합니다. 경문(經文)에 남서북방 사유상하(南西北方四維上下)라고 한 말들이 곧 그 말씀인데 사유(四維)는 네 간방을 가리킨 말입니다. 허공의 크기가 본래 한계(限界)가 없는 것이므로 얼마나 큰지를 비교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끊어져서 무심으로 하는 도심(道心)은 헤아릴 수 없고, <나라는 생각(我相)> . <남이라는 생각(人相)> . <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 . <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이 없어져서 머무는 것 없는 마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중생을 위해 보시하는 공덕은 무한대(無限大)의 허공처럼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 것입니다.





原 文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解 義 부처님께서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결론으로 「보살은 다만 가르쳐 준 그대로 머무르라(菩薩但應如所敎住)」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보리존자께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처음에 부처님께 법문(法門)을 청(請)하여 여쭈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云何應住) 어떻게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이까(云何降伏其心)」한 물음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십니다.

부처님의 경전(經典)에는 언제든지 나중 물은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물은 것은 뒤에 대답하십니다. 마치 회의(會議)하는 규칙(規則)에 개의(改議) . 재개의(再改議)가 나오며 재개의, 개의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문제를 낸 동의(動議)는 맨 나중에 결정하는 논리(論理)와 같습니다. 이 금강경에서도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을 나중 물었으므로 잘난 체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을 없애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음을 항복하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나서, 운하주(云何住)에 대한 말씀을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을 없애지 않고는 마음을 바로 가지고 바로 머무는 일(住)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먼저 말씀하시고 운하주(云何住)를 나중에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열가지든 백가지든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말씀해 주셨으며, 49년동안 이 순서(順序)를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제삼장 대승정종뿐(大乘正宗分)에서는 먼저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으로서 중생심(衆生心)을 가지고 내가 잘하거니 하는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설법(說法)을 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마음을 머무르는 법을 말씀하시기를, 「보시를 하되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주하는 방법이 「주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고 또 만일 「주하지 않는데 주한다」, 그러면 그것 역시 주하는데 떨어진 것이 됩니다. 마음을 주한다 함은 우리 말로 마음 먹는다는 소리인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라」하는 말도 마음 먹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곧 열반을 향해서 보시를 꾸준히 행하라, 「내가 본래 부처이니 부처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라」는 것입니다.



[說義]



처음부터 끝까지 여시의 숙제



금강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여시>(如是)가 자주 나옵니다. 이 「여시」가 어떤<여시>인가. 누구든지 자신 있으면 내가 묻기 전이라도 얘기하십시오. 경산림(經山林)을 다 마칠 때까지 이 여시(如是)가 숙제(宿題)가 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참말로 깨칠는지도 모릅니다. 뉴우톤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류 인력(萬有引力)의 원리를 발견(發見)하듯이 법문 듣고 오고가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깨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 깨친 얘기를 들어보면 닭 우는소리를 듣고 깨치고, 물 내려가는 소리 듣고 깨치고, 복숭아꽃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보고 깨치고, 사람들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치기도 하고 상여 나가는데 상주(喪主)가 「아이고」하고 우는소리 듣다가 깨치기도 합니다.

이 「여시」에 금강경의 내용 전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숙제로 해서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뉴우톤처럼 자나깨나 오거나 가거나 법문을 들을 때나 식사(食事)를 할 때나 이 숙제만 가지고 있으면 홀연히 깨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여시」를 완전히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다같이 눈 둘 있고 코 하나 있고 하니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설사 우리가 그 분이 도인(道人)인 줄 모르고 산다 하더라도 이런 분이 우리 나라에 계신 것만 해도 우리한테는 큰 은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용심(用心)이나 행동이 나만도 못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보살(菩薩)이라 한 말은 보리(菩提)와 살타(薩埵)가 합해진 말인데 보리 곧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밑에 살타 곧 중생은 아직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니 용심이 이러니 행동이 저러니 하고 함부로 말하다가는 까닥 잘못하면 큰 죄를 짓기 쉽습니다.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았다 해도 중생 놀음하던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것을 당장 떼어 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의 금강경 산림 가운데 정말 깨쳐서 <여시>에 대한 도리를 아는 사람이 생기고 경을 알고 대답할 사람이 생기면 참으로 경사(慶事)지만 그렇게는 못된다 하더라도 알음알이의 분별로라도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을 혼자서만 보는 것보다는 남하고 이렇게 저렇게 토론(討論)을 하고 같이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강원(講院)에서도 나 혼자서는 밤새도록 보고 새벽에 보고 아침에 보고 낮에 보고 해도 이해가 잘 안되다가도 서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번쩍 나서 풀리어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기(傲氣)로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주의(注意)를 집중하는 바람에 정신이 통일되어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정신을 희미하게 가지니까 그렇지 정신을 일념으로 통일하여 마음 자리에 가깝게 접근하면 <여시>의 지혜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견성해도 대승행 닦아야



그래서 반야경(般若經)의 실상 반야(實相般若),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을 깨달았으면 그런 다음에는 보시(布施)를 하라, 그리고 육바라밀을 다 행하라, 하는 것은 실상 반야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소승(小乘)의 나한(羅漢) 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은 초견성(初見性)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이런 잘못은 없습니다.

요새 참선(參禪)하는 수좌(首座)들이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은 하지 않고 참선 하나만 제일이라고 해서 복을 짓지 않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할 줄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된 것인 줄로 알고 공(空)에 떨어질 것을 염려(念慮)하여 六조대사께서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공(我空) . 법공(法空) . 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體得)했으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념(專念)하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일체 중생을 하나도 남김 없이 제도하라. 제도를 하되 실상 반야(實相般若)가 천당(天堂) 사람도 되고 태생(胎生) . 난생(卵生)도 되고 지옥(地獄)도 되고 한 것이니, 그 사람을 근본적(根本的)으로 내가 고쳤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지도(指導)했다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 그런 것 느끼지 말고 저건 내가 제도한 중생이거니 저건 내 신도(信徒)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문(法門)을 듣고 배우는 중생들에게도 듣고 배운 건 다 알고 나면 잊어버리고 들을 줄 아는 그것도 깨치도록 해서 지도를 받았거니 배웠다 거니 하는 아상 . 인상이 없어지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시(布施)하고 계행(戒行)도 잘 지키고 인욕(忍辱)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辱)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남이 욕한다고 야단 치고 보복(報復)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煩惱)의 생사심(生死心)만 늘지 언제 보리(菩提)를 성취(成就)합니까.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근본이지만 반야를 깨친 다음에는 그래서 나의 업보(業報) . 망상(妄想)을 쉬고 녹이는 데는 인욕(忍辱)이 중심이 됩니다. 남이 칭찬을 해도 들은 체 만 체할 것도 없고 남이 욕을 하고 때려서 반죽음이 되었어도 「왜 그러냐」고 한마디 따질 것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이 마음 자리는 어제도 이 모양이고 오늘도 이 모양이고 내일도 이 모양이고 여려 천만년 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成佛)한 뒤나 똑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른 건 모두 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갈팡질팡하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존재이지만 이 마음 자리는 중생이나 부처나 다 같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두루 다 평등한 것이므로 내가 깨우쳐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 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하고 당장 천하태평객(天下泰平客)이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실패를 했다 성공을 했다.」 그런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현실(現實)은 마음에서 생긴 꿈이니 이런 식으로 알고 내일부터라도 흉내 내어 살아 봅시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하면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어도 능률이 더 나고 근심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제는 죽고 살고 흥망성쇠(興亡盛衰) . 시간세계(時間世界)를 다 초월(超越)해서 망각(忘却)했기 때문입니다. 공포증(恐怖症)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있고 욕심이 앞서 있으면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정구장(庭球場) 앞을 지나치던 정구선수가 친구의 권유(勸誘)로 아무 부담 없이 잠깐 쳐보려는 생각으로 몇 번 친 것이 선수 생활 십년 동안에 한 번도 쳐 본 일이 없는 아주 훌륭한 볼을 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꼭 이기겠다는 욕심이나 지면 큰 일 이라는 공포심이 없이 아무 생각 없는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처가 정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 한 근본 자성 자리에 합하기만 하면 이런 묘한 기술(技術)이 나옵니다. 권투나 축구나 검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울 연습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만능(萬能)하던 마음 자리가 안심(安心)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만 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이 나옵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잘 써야 되겠다는 공포증(恐怖症) 때문에 잘 안 써집니다. 왕희지(王羲之) 같은 이도 어느 날 친구의 연회(宴會)에 초대되어 만취(滿醉)하여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 줄 썼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 보니 자기로서는 십년 백년이 걸려도 쓸 수 없는 명필(名筆)이 있어서 「어느 신선(神仙)이 와서 나를 깨우쳐 주려고 써 놓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며칠 뒤에야 자기가 취중(醉中)에 썼다는 것이 기억(記憶)이 됐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글씨의 십분의 일도 따라 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글씨도 무심하면 자연히 명필이 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어디에고 이끌림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應無所住) 남을 도와주고 보시를 행한다면(行於布施) 큰 보람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을 내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에 머무름 없이 부주상으로 보시(不住相布施)하면 그 복덕이 한량없이 많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무한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불입문자 교외별전의 자리



그러면 머무른 데 없이 보시를 행한다(應無所住 行於布施)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시하는 것을 뜻하는가. 앞에서도 말한바 있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리는 생활 . 육체 생활을 정리해서 하루 종일 나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차차 돌리고 탐욕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정리해서 참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돌리며 오직 남만을 위해서 사는 보살행을 하라는 말입니다. 보살행은 본래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고 하여 위로는 부처님의 보리 . 열반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니 보리라 함은 생사도 열반도 없고 시간도 공간도 남자도 여자도 부처도 중생도 초월하여 초월한 그것까지 없는 자리를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보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으로 오직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보살행이라 합니다.

내가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은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몇 시간 얘기를 계속해도 피로가 안 오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마음은 글이나 지식으로 분별해서 알아질 수 없는 자리이므로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도리라 합니다. 말이나 문자를 가지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이심전심의 법으로 전법하셨으므로 교 밖에 따로 전했다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합니다. 또 이 자리는 말이나 글로 기르치는 것은 오히려 간접적인 방편에 불과하므로 마음을 직접 가르쳐서 그 본성을 깨우치게 함으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도리로 성불하게 하는 법이 바로 선종(禪宗)입니다.

그래서 대선사(大禪師)에게 법문을 청할 때나 주요한 의식을 할 때면 늘 이런 게송(偈頌)을 외웁니다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개권무일자 상방대광명(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開卷無一字 常放大光明)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사람마다 다 이 경전이 있지만 그러나 이 경전은 종이나 먹으로 쓴 글씨거나 인쇄 제본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므로 펴 봐야 한 글자도 없다. 이렇게 종이나 먹으로 된 책이 아니어서 한 글자도 없는 이런 경전이 나에게 한 권이 있는데 상방대광면(常放大光明)이라, 항상 큰 광명을 발하여 전 우주를 환히 비추고 있다.」 이것이 곧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금강경의 믿음으로 보면 반야(般若)고 내가 항상 말하는 마음입니다. 이 반야 . 마음을 얻어서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할 때면 손이고 발이고 눈이고 목숨이고를 돌보지 않고 다 보시하는데 지기를 희생했다는 생각도 중생이 구제됐다는 생각도 없이 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이것이 「응무소주」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순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제자들이 대개 청법을 해 오는데 무엇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 뜻은 무엇인지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때로는 열 가지 백 가지로 여쭈어 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처음 물은 것부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물은 것부터 먼저 한 문제 한 문제 설명해 주십니다.

금강경도 제2절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수보리존자가 먼저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오며(應云何住)를 여쭈었고 나중에 「마음을 어떻게 항복하겠사옵니까(云何降伏其心)」하고 두 가지를 여쭈었는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제3 대승정종분에서 나중에 여쭈어 온 「마음 항복 받는 법」을 먼저 말씀하셨고 먼저 여쭈어 온 「마음 머무는 법」에 대해서는 제4 묘행무주분에서 나중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如理實見分 第五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身相(가이신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라 世尊(세존)하 不可以身相(불가이신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所設身相(여래소설신상)은 卽非身相(즉비신상)일새니이다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니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이면 卽見如來(즉견여래)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의 몸매로 여래를 볼 수 없사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육신은 곧 육신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있는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第五 如理實見分--실제의 마음을 보라



[科解]

여기서 금강경의 핵심이 또 나옵니다. 그 골수는 소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냐, 그것을 모르면 네가 아무리 불교를 믿고 사십구년 동안 부처님 모시고 법문을 들어 보았자, 아무 필요 없는 헛일이 된다는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분절(分節)입니다. 소위 불성(佛性)자리가 있다고 하지만 불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역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철학자를 따라다니고 부처님을 따라다녀봐도 마치 껍데기가 따라다니는 것에 불과합니다. 흔히들 불교를 피상적(皮相的)으로만 보고 「현실을 무시하고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 몸뚱이보다 한 발 더 앞에 있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입니다. 몸은 마음 뒤에 따라다니는 그림자입니다. 마음이 앉아야 몸이 앉고 마음이 먼저 드러누어야 몸이 따라 드러누우니 어떤 것이 현실입니까. 항상 앞에 있는 이것이 현실 아닙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마음이 현실이고 주체입니다.

이 마음이 만사(萬事)의 주체입니다. 남에게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마음이 먼저 시작하면 몸뚱이는 따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언제나 뒤에 쳐져 있고 마음은 어느 곳 어느 때에나 현실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 현실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 몸뚱이부터가 확고한 정체(定體)가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물건들 물질은 다 변하여 없어지는 것이며 정체가 있어서 현실이라고 지적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보리 네가 지금 나한테 묻는 그것(마음)이 무엇이냐.』 수보리 존자는 그 뜻을 아시지만 미래 중생들을 위해서 일부러 물으시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시집을 가야 산다. 장가를 가야 산다.』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두 분께서 신파 연극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네가 무엇이냐. 여래가 무엇인가.』 하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밝힌 것이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인데 이치대로 진리 그대로를 실답게 보는 절이란 뜻입니다. 이 절에서 금강경의 진리를 대표하는 사구게(四句偈)인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이 나옵니다. 이 뜻을 잘 해득하면 금강경을 다 알게 됩니다.





原 文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解 義 부처님은 안으로 마음을 깨쳐 지혜가 밝으실 뿐 아니라 밖으로 생긴 몸의 모습도 곧 신상(身相) . 몸매도 보통 사람에게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하십니다. 부처님의 모습은 서른 두 가지로 거룩한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있고, 여든 가지로 뛰어난 팔십종호(八十種好)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무량겁을 지내 오면서 보살만행(菩薩萬行)을 닦으실 적에 오직 중생만을 위하여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주었고,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가진 돈이 없으면 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약도 사 주고 먹을 것도 마련해 주고 합니다. 누가 당신 팔이나 눈을 약으로 쓰겠다고 하면 조금도 주저 없이 팔도 짤라 주고 눈을 빼 줍니다.

이와 같이 선행(善行)을 하면 아주 복된 삶을 살게 되는데 부처님은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곧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어서 그 털이 보통때는 말려 있지만 그것이 펴지면서 광명이 나오고 신통이 나옵니다. 또 정상육계상(頂上肉髻相)이 있는데 정수리에 살상투(肉髻)가 있어서 보통사람에게는 정수리 맨 위가 보이지 않으며 또 열자나 되는 광명이 부처님의 몸 위에 항상 있는 등 세상 사람에게 없는 서른 두 가지상(三十二相)과 여든가지 좋은 모습(八十種好)이 있습니다. 이런 상호(相好)는 물론 범부에게는 다 없는 상이고 부처님에게 특별히 있는 상이고 공덕으로 나타난 상이니『이런 상호로 여래 곧 부처님을 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原 文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解 義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 「부처님 몸의 상호가 아무리 거룩하다 하더라도 그런 육신의 몸매를 가지고 부처님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사뢰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을 <여래>(如來)라고 했는데, 이 마음은 본래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지식도 사상도 선도 악도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이 마음은 알 줄 아는 것 뿐이고 순수한 생명 . 청정한 본심이며 질량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은 같은 것과 같다는 뜻으로 여여(如如)하다고 합니다. 여래(如來)란 말은 이와 같이 같은 여여한데서 그와 같은 이가 왔다는 뜻입니다. 생로병사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 태어났다는 소리입니다. 언제나 같으니 거래(去來)도 직위도 동서남북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는 그런 사람이 탄생했습니다. 그이가 바로 석가여래입니다. 몸뚱이는 비록 뱃속에 들어가서 열달 만에 아이가 되어 이 세상에 나왔고 실달태자가 되어 커서 출가해서 견성(見性) 오도(悟道)하여 설산(雪山)을 내려오셨지만 그 마음은 여여한 그대로 마침내 우리를 제도하려 오신 여래가 바로 석가여래십니다. 부처님의 마음자리뿐만 아니라 석가여래의 육신도 불생불멸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육신은 환상이고 꿈에 있는 몸뚱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으로 있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환상이란 불교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이 마음자리는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어져서 없는 것조차도 없어진 것이니 참으로 빈 것이며 허공도 아닙니다. 차라리 허공도 초월했다 그렇게 말하면 그 뜻이 아주 쉬운데 빈 공자(空)를 써서 온갖 강의를 다해 놓으니 도리어 알기 어려워집니다.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고 지식도 사상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니다 보니 진짜로 공한 것인데, 그렇다고 허공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온갖생각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졌다는 생각도 없고 그래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없기는 없는데 어떻게 없는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짜로 없는 이것이 금강경 강의해 달라고 와서 물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대답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묻고 대답하고 하니 뭐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처럼 있는 것으로 있지도 않고 허공처럼 텅비어 없는 것으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이 소리를 잘못 알아들으면 공부하다가 아무것도 없는 경지가 나타나면 견성했다 도통했다 그럽니다. 그러니 있기는 있는데 있는 것도 있는게 아니고 물질로 있는게 아니고 없는 허공으로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이것을 묘하게 있다(妙有)고 하는 것입니다. 물으면 대답하고 먹고 배부르면 변소 가서 꿍꿍 앓고 이런 신기한 짓을 하니 참 묘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붙잡을 수 있고 쳐다볼 수 있고 생각해 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들어 볼 수도 없고 대질러 볼 수도 없고 그러니 이런 편으로 보면 꼭 진공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중생도 부처도 아닌 그런 것이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먹으라면 먹고 추운 줄 알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무엇이 분명히 있는 것이 물질처럼 있는 것도 아니고 허공처럼 없는 것도 아니므로 있기는 있는데 기이하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자리인 이 생명은 진공묘유(眞空妙有)한 것이니 따라서 물질의 구성체인 이 육신이 아무리 미묘한 상(相)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런 상호(相好)를 가지고 여래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原 文 何以故 如來所設身相 卽非身相

解 義 『왜 그러냐 하면(何以故)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뚱이의 모양(如來 所設身相)은 곧 몸뚱이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몸뚱이의 모양이 여래일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卽非身相).』하고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육체를 나라고 하여 여자 몸뚱이 타고 나면 시집 가려고 애를 쓰고 남자 몸뚱이 타고나면 장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애를 씁니다. 이런 망상을 버리지 못하여 죽어서 또 태어나고 업을 짓고 하게 되는데 한번 나서 늙어 죽는 고생이 보통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죽을 수 없어 살아 있는 것이지 살아 갈 이유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세상은 결국 먹고 똥 싸고 그것 때문에 무의미 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꼼짝 못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그것을 위해 죽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모두 농사짓고 장사하는 이유는 죽기가 싫어서 안죽으려고 하는 짓에 불과합니다. 단 십분이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질합니다. 그러나 농사짓고 장사하는 게 인생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 죽으려고 결정만 했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합니다. 농사짓고 장사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아닌 본래 우리의 생명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니 밥을 먹어 산 것도 아니고 무엇을 위해 산 것도 아니고 돈을 위해 산 것도 아닙니다. 이 <마음>을 발견하고 발심한 보살은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상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하고 행동을 바꿔야 합니다. 그게 바라밀이고 응무소주(應無所住)하는 행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 생사를 초월하여 죽음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하루 밥 세 끼가 재미나서 먹는 것도 아닙니다. 밥 안 먹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누가 씁쓸한 산삼을 먹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안 먹고 영원히 살아 있는 우리 마음을 깨쳐야 합니다. 그래서 전 우주의 관광여행이나 다니고 아무 할일 없는 관광여행, 중생제도를 위한 여행 길에 올라서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모두 마음 깨쳐 생사해탈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육체와 정신 두가지가 있는데 어느게 참 나인가, 이 육체는 언젠가는 늙어 죽을 것이며 그것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근육이나 뼈가 우리 몸뚱이의 주가 되는데 이것을 분석해 보면 결국 수분 . 당분 . 지방질 등의 물질적 요소에 불과합니다. 혈액이나 오줌 등을 보더라도 결국 이것은 물질이며 오장육부는 물론 뇌세포까지라도 그것은 물질적 구조에 불과하며 물질은 결국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이 몸뚱이는 마음이 없으면 송장입니다. 육체를 부려먹는 게 마음입니다. 마음은 운전수고 육체는 택시와 한 가지입니다. 마음이 몸뚱이더러 앉으라, 서라, 가자, 온갖 일을 다 시킵니다.

그런데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는 것이므로 마음이 곧 나입니다.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산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히 믿어지면 그날 저녁부터 잠도 잘오고 영원히 죽움을 면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니 큰 환희를 얻습니다. 곧 이 몸뚱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原 文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解 義 이 금강경 계통을 전부 통틀어 반야부(般若部)라고 하고 그 부수(部數)만도 육백부나 되고 경책의 권수로는 이천권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반야심경(般若心經) 같은 작은 경도 있지만 큰 경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백부의 골수를 통틀어 얘기하는 대표적인 글이 다음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란 네 구절입니다. 이 네귀 열여섯글자 안에 금강경의 핵심은 물론 반야 육백부 전체의 뜻을 유감없이 표했다는 뜻에서 반야제일게(般若第一偈)라고도 합니다. 그 게송(偈頌)의 뜻은 『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이 모든 현상이 상이 아닌 줄을 직관(直觀)할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고 마음을 깨친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무릇 있는 바 모양(凡所有相)이란 현상계를(現象界)를 말하고 이때에 현상은 모든 생각, 안 보이는 모든 것까지 다 포함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만분의 일초도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질량 변화를 쉴새 없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엇이 됐다가 돌아오고 하므로 이것은 결국 믿을 수 없는 허망상(虛妄相)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皆是虛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학문 . 예술 . 종교 . 불교도 다 허망하고 오직 자기 마음만이 진짜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로 구나」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마치 실연당했을 때 보다도 더 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여자하고 연애를 하다가 그 여자 뒤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또는 그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려고 했던 그 마음이 홱 돌아섭니다. 그 총각 처녀 지나간 길로 걷기도 싫어질 겁니다. 애정문제 가지고도 이렇게 마음이 돌아서는데 하물며 우주 인생의 근본문제에 있어서는 말할 게 없습니다. 온 세상이 날 죽이려하고 부처님까지도 날 죽이려고 하는 것 같을 겁니다. 이 육신을 죽여서 구렁텅이에 꼼짝 못하게 해 놓고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우주 인생과 나와는 완전히 정이 뚝 떨어집니다. 연애하다 실연 당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육신인 가짜 나는 이 얘기 끝나고 죽을지, 앞으로 계속 얼마나 살아 있을지 그걸 생각하고 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착하게 됩니다. 남편이 작은여자를 얻어 속을 썩이더라도「누가 먼저 죽을지 모른다. 내가 전생에 남편에게 속을 썪여서 나에게 복수하는 것이니 달게 빚이나 갚자.」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배워야 할 지식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나면 모든 것이 상(相)이 아닌 것으로 보게 됩니다(若見諸相非相). 「이 세상에 미련이라고 남을만한 사건이란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허망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고 마음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니 그게 곧 참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자리가 닳아 없어지도록 육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몸뚱이 한테 정이 떨어지고 나니 마음만 드러납니다. 눈과 귀가 보는 게 아님을 확실히 알면 몸뚱이도 포기해 버리고 우주와 온 세상을 다 포기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나면 버릴 수 없는 것만 남는데 그것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자리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깨치기 전에도 여래(如來)하면 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연애하다 한번 배신 당하면 뜨겁던 정이 냉정하게 끊어져서 얼음보다도 더 식어 버립니다. 우리도 이 육체와 무서운 연애를 한 셈입니다. 그 어느 누구한테 어느 무엇에게 보다도 다시 없이 이 몸뚱이를 소중히 아끼고 거두고 하루라도 더 살리려고 아들 딸도 제쳐 놓고 불성(佛性) 자리만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그것들이 다 상(相)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발견한다. 곧 자기를 자꾸 정리해서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육체의 생각을 정리하면 마음 자리를 발견합니다(卽見如來).

금강경에 사구절만 읽어 가지고 성불한 사람도 있고 반야바라밀만 읽어 가지고 신통(神通)이 나오기도 하고「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만 외워서 견성(見性)히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가지만 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다라니를 하든지 하나에 전념을 해야지 이것 저것 다하면 그것은 허욕이 되고 정신이 한 가지로 통일 되기 어렵습니다. 가령<옴마니반메훔>만 자꾸 염송(念頌)하다 보면 나중에는 소리도 아니고<옴메>만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깨닫는 시간이 빨라집니다.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그런 줄 확실히 알았으면 마음이 드러난다는 금강경 사구게 곧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를 마음을 다해 읽었다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안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을 천독만독(千讀萬讀)해서도 안된다면 내생에 또 독송할 각오로 자꾸 읽어야 합니다.





[說義]



마음을 찾는 생활



모든 것이 다 허망한데 그 중애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뿐이라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꼭 알아야겠다 하면 그것은 이미 견성에 연결되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오직 이 마음을 알아야겠구나.」하는 마음으로 이 경문을 읽으면 이것이 곧 천 칠백이나 되는 참선의 화두공안(火斗公案)을 다 생각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도 내가 아니고 우주도 실재가 아니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라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 가운데 마음만은 어제도 오늘도 그렇고 작년도 금년도 백년 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당을 가도 지옥을 가도 이대로고, 소가 돼도 개나 구렁이가 돼도 마음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몸뚱이가 개가 되고 구렁이가 되었을 뿐 내가 개고 구렁이이구나 하고 생각할 줄 아는 근본 마음자리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여자가 되나 남자가 되나 짐승이 되나 송장을 끌고 왔다갔다하고 배고프다고 밥 먹고 똥누는 생각을 내는 주체, 부정하고 긍정하는 주체, 그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지금 말하고 듣는 이대로 영원히 살아 있는 <참 나>를 발견하면 그때부터 논이고 밭이고 재산을 전부 팔아서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줍니다. 집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고 배고프고 옷 없는 사람에게 밥을 주고 옷을 주어 다 보시 합니다. 의식주의 재산을 보시하고 그 다음에 또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게 옳게 사는 것인가, 다른 것은 다 하나마나하고 이것만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학문은 하나마나하고 세계제일가는 박사가 돼 봐도 생로병사는 면하지 못하고 하루 밥 세 그릇 꼭 먹어야 합니다. 육신은 내가 아니고 죽어 없어질 한낮 물질이며 죽지 않는 마음 영원히 살아있는 <내>가 어디인가를 일깨워 찾아 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꼭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이 두가지만은 꼭 배워야 합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 마음 깨달아 우주에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 이렇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바른 정신 넣어 주는 것이 정법(正法)을 펴는 법시(法施)인 것입니다. 또 위태롭고 외롭고 근심 속에 괴로와하는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고 마음을 깨치면 생사를 초월한다. 마음을 깨치면 부처이니 석가여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믿는 것이다. 석가여래도 나 같은 사람으로 마음을 깨쳐 부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깨칠 수 있는 법을 그대로 남기어 놓았으니 부처님 하시던 그대로 수도를 하면된다.」 이런 이치를 알아서 몸뚱이가 나인 줄 알기 때문에 모든 근심걱정이 있는 것인데 마음이 나인 줄만 알면 아무 근심걱정 없어집니다. 남이 내 돈을 다 들어 먹고 알거지로 만들어 놔도 그 사람이 밉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바로 믿도록 정법을 일러 주면 확실히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그래서 모든 근심걱정이 없어지므로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이 참나임을 가르쳐 주는 것은 확실히 법시 이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의식주에 구애가 없으니 아무리 굶어도 걱정을 안하고 우리 생활을 완전히 남만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바꿉니다. 바라밀을 도피안이라 하지만 그말이 어렵고 차라리 현명한 생활을 한다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생존경쟁에만 몰두하던 생활을 아침 저녁으로 다만 10분이라도 참선을 해서 이 마음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찾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의식주 생활도 반대로 자기를 깨치는 시간이 됩니다. 10분이 차차 20분이 되고 나중에는 열 시간쯤 참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밥 먹을 때도 옷 입을 때도 똥 눌 때도 기차시간이나 학교 가서 선생 강의를 들으면서도 화두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해 나가면 24시간 꼬박 참선이 됩니다. 염불도 그렇게 됩니다. 경희대학에 한 학생이 참선을 배워서 화두(話頭)를 하는데 전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화두만 하다가 어떤 때는 버스 종점으로 아주 간다는 것입니다. 화두에 열중하다 보면 나중에 그런 식으로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학교성적은 자꾸만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강의 한 번 들으면 완전히 기억되고 시험 때가 되면 다 알게 되는 때문입니다. 공부를 바로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해서 마음을 턱 놓고 살 수 있는 지경에 들어가면 그렇게 됩니다. 신경이 사방에 쓰이고 온갖 번뇌가 들끓고 그래서 피가 나빠지고 신경이 약해지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하던 것이 정신을 크게 안정하고 사니까 모든 것이 다 잘 됩니다. 그래서 농사하는 사람 밭은 밭대로 더 잘 가꾸고 지혜도 나오고 하여 생(生)의 투사 . 진리의 투사가 됩니다. 육체본위로 살던 생활을 마음 본위로 사는 혁명투사의 생활로 바꿔 나가는 셈입니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얘기가 이 금강경입니다.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든 것



앞에서 진공묘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 육신과 일체의 물질은 다 환상이고 꿈에 있는 몸뚱이와 같으며 따라서 참 말로 있는 것이 아니고 환상으로 있는 것이므로 아무것도 없는 진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진공도 한 개의 가상(假想)이고 진상은 아닐 뿐 깊이 생각하면 환각 . 환상으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이렇게 생시에 칠판 옆에 서서 강의하는 것을 본 여러분은 꿈에 가서도 이 청담이 칠판 옆에 서서 강의하는 걸 보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꿈속에 나타난 이 청담은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있는 이 청담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늘 보고 듣고 기억한 그 기억이 꿈에 가서 이 청담 목소리도 되고 몸뚱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각하고 객관하고는 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이자 곧 이 청담이고 여러분의 생각이자 곧 법당입니다. 그러니 물어 볼 것도 없이 이것은 확실히 여러분의 환각(幻覺)이고 쓸데 없는 생각입니다. 생각 그것이 환상을 만들었고 그러므로 현재의 이것이 다 하나의 환상이고 참말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은 물질로 있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 의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객관으로 된 꿈에 가서 남편과 여러달 살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지금 이불 속에 있는 남편이 자기 남편이 아니고 자기 마음 속에 남편을 기억하고 있는 그 기억이 남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남편이 나를 그렇게 좋아하느냐 하면 그것은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좋아한 것입니다. 꿈속의 남편은 내 생각이 만든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꼭 생각하고 있던 남편의 모양, 성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이 그대로 남편이 되어 가지고 밤에 나와 어디로 놀러 가자고 하여 남편따라 호강을 하고 하는 것인데, 저 혼자 둘이 돼서 돌아다닌 것입니다. 제 마음의 생각이 자기도 되고 남편도 되고 해서 돌아다닙니다. 그러니 이게 환상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이 모든 것도 다 그렀습니다. 이것이 다 그대로 꿈이라고 하면 처음 듣는 이들은 이해되지 않겠지만 확살히 생시(生時)도 꿈입니다. 서론에서 자세히 얘기한 바 있지만 꿈에 들어갈 적마다 생시를 모두 잊어버립니다. 나를 나아서 키워서 대학까지 보내 준 우리 어머니가 여기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것이 어찌 꿈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을 베어도 이것이 생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시에는 꿈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세 살 먹어서 꾼 꿈을 팔십노인이 기억을 하고 있으니 우리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꿈입니다. 반면에 생시는 꿈에 의해 부정됩니다. 우리 기억에서 떠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바꾸어 생시를 꿈이라 하고 꿈을 생시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년만년 사는게 꿈이고 백년 밖에 못사는게 생시입니다. 따라서 긴 세월을 경험하는 꿈이 생시입니다. 그런데 꿈에 있는 몸뚱이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 한상입니다. 환으로 있는 상이므로 있다 해도 안되고 없다고 해도 안되니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내 생각입니다. 생각이 에너지가 되어 있고 에너지가 물질로 남산으로 되어 가지고 올라가면 확실히 숨차고 힘듭니다. <있다 없다>를 초월하여 사차원세계에 들어가면 남산도 몸뚱이도 어떤 생각도 없고 번뇌도 환상도 없습니다.





착각의 연속 속에 산다



현상세계도 꿈과 다름없이 하나의 환상입니다. 가령 여기 있는 나의 이 그림자도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여기서는 없어지고 저 쪽에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그림자는 없어진 게 아닙니다. 광학적(光學的)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림자는 광선을 막은 것인데 광선을 막은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육안이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림자 자체는 없는 것이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달 밝은 밤에 한강 뚝에 나가 보면 한강 물 속에 비친 달이 자꾸 따라옵니다. 그런데 그때 물 속으로 따라오는 그 달은 저 허공에 매어 있는 그 달의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달의 그림자란 무수한 광선이 쏟아져 내려 온 것이므로 온 땅 위에 달 그림자는 꽉차 있는 것입니다. 한강 물에 수억만개의 달 그림자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있는 위치가 달라져서 안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A자리에 서 있다가 B의 지점으로 옮겼을 때 보이는 물속의 달은 곧 달의 그림자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A지점에서 본 달의 그림자가 B지점에서 보이는 자리로 이동된 것이 아니고 나의 위치가 바뀌었으므로 A지점에서 보던 달 그림자는 보이지 않게 된 것이고 그 다음 B지점의 달의 그림자가 보인 것뿐입니다. 따라서 전혀 다른 달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므로 우리 육안네는 달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아도 실은 먼저 달 그림자는 안 보이고 다른 달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며 자리가 달라질 적마다 보이고 안 보이고 다른 그림자가 또 보이고 이것이 연속된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그림자는 광학상 전혀 우리들의 착각에 의한 잘못된 인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관을 가지고 각 분야에서 착각의 연속 속에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사실대로 듣지도 느끼지도 못합니다. 모든 물체가 다 환이고 꿈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걸어서 이 쪽으로 몸을 이동하면 여러분은 이 청담이 갔다고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처녀 인물이 참 잘 생겼다고 하는데 그것도 생각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차원 . 오차원 세계에 들어가면 이와 같은 오관으로 잘못 알아지고 있는 물질의 환상계(幻想界)가 사라지고 마음으로만 얘기하고 생활하게 됩니다. 그 마음은 <진공묘유>이기 때문에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현실은 곧 마음



우리가 이제 육체를 가지고 나라 하고 오관에 의한 인간 이것이 참된 <내 생명>인 줄로 소중히 여깁니다.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무시하면 곧 「현실을 부정해서 되겠느냐.」결사적으로 항의합니다. 그러나 「현실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현실이지 육체가 현실은 아닙니다. 육체는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실재의 현실이 아니고 환각으로 있는 것 뿐이란 뜻입니다. 이 조계사의 이 법당도 그렇고 서울 시내도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이 다 환각으로 있는 것이지 진실상이 아니며 실재가 아니다. 그런 줄 알고 보면 곧 부처님을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하셨는데 부처님을 본다는 소리는 곧 자기 마음을 깨친다는 소립니다. 마음 깨치면 다 부처니 모두의 마음은 이미 다 부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견성(見性) 했느냐 하는 말은 부처님을 보았느냐는 말이 됩니다. 우리 불교는 따지고 보면 지나칠 정도로 무서운 틀림없는 이론 입니다. 전자 계산기로 계산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몇 천배 더 철두철미한 이론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미리 질겁을 해서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과 수보리존자 두 분의 문답하시는 내용을 지세히 따라 들으면 견성합니다. 곧 자기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까지가 다섯번째 구절로서 어느 구절에서나 견성할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 듣기 싫으니까 설명방법을 바꿔 가며 말씀하십니다.





영차원(零次元)



현상이 실다운 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발견한다(若見諸相非相)란 말은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말을 바꾸어 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환상이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니 지금 이 법당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지옥도 있고 천당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공간에 조그마한 법당 속에 한량 없는 우주가 이 안에 다 있고 공간이 있고 시간이 다 있고 우주와 차원이 다른 하늘나라 등의 다른 현상계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여래를 본다 했으니 그 말 조리를 놓치지 말고 따라 붙어야 합니다. 자꾸 따라가도 이 이치를 알아 듣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금강경 . 반야경의 공(空)의 뜻이 이리 엉기고 저리 엉켜서 쉽게 알기 어려우므로<넝쿨반야경>이라고 일컬어 옵니다. 진공과 막 엉키어서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아서 소위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내용을 해득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에<공>을 세웠는데 그 공의 뜻이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어 무엇인지 사실 알기 어렵습니다.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라는 뜻이며 허공도 물질도 아니면 있을 게 없으니 그것은 사차원 오차원 . 천차원 . 무한차원(無限次元)의 세계를 말합니다.

본래 우주가 처음 형성될때 텅반 허공만 있었는데 지구도 태양도 공기도 없을 때, 텅빈 그때의 그것을 영차원이라 한다면, 이 영차원의 시대에 무언가가 하나 생겼고 그걸 점이라 치고 이 조그만 점에 대해 여러 가지 술어가 있지만 이름뿐이지 반점이라 해도 기실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점을 여기 찍어 놓아도 이것은 면적이 있습니다. 좁쌀을 쪼개어 놓는다 해도 면적이 있습니다. 바늘 끝으로 조금만 찍어 놓아도 면은 있게 됩니다. 면이 있으면 넓이가 있는 것이므로 점은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점은 무엇인가. 이 점이란 말로만 있고 글자로만 있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조차도 아닌 것 다시 말하면 숫자의 영이나 마찬가지로써 없는 거나 한가지입니다.





사차원(四次元) 오차원(五次元)



영차원의 세계나 점이나 그 뜻은 다 같이 없다는 점에서 동일한데, 그 다음에 비로소 일차원의 세계가 벌어 집니다. 일차원의 세계는 곧 물질의 단차원, 연속된 점의 세계를 말합니다. 점을 연속시킨 직선, 곧 선의 세계입니다. 그것도 외줄 단 하나의 줄만이 있어서 오른쪽 왼쪽이 없습니다. 앞과 뒤만 있는 기차 선로나 전차 선로는 일차원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담배씨보다도 더 작은, 가령 수소나 산소를 늘어 놓아도 선이 될 것입니다.

이차원의 세계도 선의 세계이긴 하지만 선을 포개어 놓아서 평면이 생긴 것, 그래서 앞 뒤와 왼쪽 오른쪽 양면이 생긴 평면의 세계를 말합니다. 삼차원의 세계는 평면을 포개어 부피가 생긴 입체적인 세계를 가리킵니다. 두께가 생기어서 아래 위까지 생긴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일차원의 세계는 전후의 이면만의 세계고 이차원의 세계는 전후 좌우 사면의 세계를 말하며 삼차원의 세계는 전후좌우상하의 공간세계를 말하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시방세계(十方世界)라고 합니다. 십방을 시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의 표음법(表音法)을 따른 종래의 습관입니다. 그러므로 일차원의 세계에 사는 중생은 앞뒤만 알지 옆을 모릅니다. 앞과 뒤로만 왔다 갔다하는 것, 예컨데 전차나 기차 같은 것은 앞과 뒤로만 가므로 이것은 일차원의 세계라 하겠습니다. 자동차 같은 것은 동서남북 어디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 이차원이고, 비행기는 면을 달릴 수 있고 아래 위로 다닐 수도 있으니 입체적인 삼차원의 세계입니다. 지구나 태양은 삼차원의 세계에 불과합니다. 지구도 선이 포개어지고 평면이 쪼개어져서 지구덩이가 된 것이고 태양도 그런 것입니다. 중생들은 다 이 삼차원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으면 도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우리의 육체는 삼차원의 세계에서 생겨서 여기서 우물쭈물 하다가 도로 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사람은 영원히 죽고 마는 것이다. 우주 전부가 물질 뿐이다. 사람 . 개 . 소 모두가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물질 놀음이다.」 이렇게 보기 때문에 유물사상이 생긴 것입니다. 제일 고등동물인 우리 인간도 이 삼차원의세계에서 오관작용의 경험으로 살다가 마는 것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 해도 이 삼차원의 세계에서 헤메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삼차원의 세계 밖에 사차원의 세계를 경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차원의 세계는 흔히 막연히 시간세계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을 더욱 분석해서 삼차원의 원리를 초월한 정신세계를 뜻하는 말로 설명하려 합니다. 정신수양이 된 사람에게 까끔 그런 경우가 생깁니다. 정신상태가 조용해졌을 때 뜻밖에 시골에 있는 식구들이 다 보이고 얘기하는 소리가 다 들리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육체의 작용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오관 가운데 육안으로 몇 백리 몇 천리 밖에 있는 시골 집이 보일 수도 없고 귀를 가지고 시골에서 얘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차원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차원의 세계, 곧 오관이 아닌 다른 오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차원의 세계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일본의 어느 시골 두메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십리 만큼 집이 하나씩 떨어져 있는 시골에 두집이 사는데 그 근방 산이 다 한사람의 소유이어서 이 사람들은 그 산에 벌목(伐木)을 해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두아람 세아람되는 큰 나무들을 오십개 이상을 베고서야 제각기 제집으로 갑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나무를 베어 그 나무가 곧 넘어가게 됐는데 또 한사람이 그 나무 넘어가는 곳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비켜나라고 소리를 쳤지만 그 사람은 비켜나지 않고 있다가 나무에 깔렸습니다. 세 아람이나 되는 큰 나무에 깔려 떡이 되었을 것이라 겁이나서 나무를 번쩍들어 저쪽으로 옮겨 놓고 보니 그 친구는 완전히 떡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십리 밖에 있는 경찰에 달려가서 신고를 했고 경찰은 현장 검증을 나왔습니다. 시체는 바싹 부서졌고 확실히 나무에 친 피투성이 흔적이 있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나무는 몇 백명이 달려 들어야 들어서 던질 수 있는 큰 나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네가 죽인 것이 아니냐. 누구하고 이 나무를 옮겼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사람은 자기 혼자 옮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거짓말이다. 저렇게 큰 나무를 네가 혼자 어떻게 옮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조사도하고 고문까지 해 보았습니다. 마을에 가서 확인을 해 봐도 그 마을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남녀노소 다 올라온다 해도 들 수도 없습니다.

결국 네가 친구를 구해야겠다는 정성에서 이 나무가 들렸던 것 같다고 판단한 나머지 이십원을 상금으로 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십세기 부사의 사건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역시 사차원 세계의 정신능력이 발동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급하다고 생각됐을 때 그 때는 나무가 크니 적으니 하는 생각도 없이 그저 「들면 들릴 것이다」하는 생각 뿐입니다. 그렇게 확신한 그 정신력이 그것을 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마음의 힘은 불가사의



옛날에 어떤 노장(老丈)님이 큰 산꼭대기에 암자에서 칠 . 팔세 되는 애기를 하나 데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김치가 떨어져서 마을에 김치거리를 좀 얻으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단지 몇 개를 잘 씻어서 뒤집어 놓으라고 시켰습니다. 노장님이 마을에 내려가서 먹을 것과 김칫거리를 한짐 잔뜩 얻어 걸머지고 올라와 보니 지금까지 보지도 못하든 낯선 단지가 절에 있었습니다. 우그러지고 삐뚤어진 것들이 대 여섯개나 뜰에 널려 있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아마 옹기 장수가 왔었구나.」 하면서 「항아리를 사려면 돈을 주고 사지 왜 이런 것을 샀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사지 않았습니다. 옹기 장수는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그러면 이 단지들은 어디서 난 것이냐. 모두 다 없던 것들 아니냐」「아닙니다. 그전에 있던 단지들입니다. 스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내가 뭐라 했더냐.」「씻어서 뒤집어 엎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스님 가신 뒤에 좀 놀다가 씻어서 무릅에 대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버선짝 뒤집듯 후딱후딱 잘 뒤집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순진해서 뒤집으면 뒤집어지는 것으로만 알았던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도 없이 산에서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놈 거짓말 하지 말아. 너 그러면 한번 뒤집어 봐라.」 그래서 아이가 무릅을 대고 뒤집으려고 하니 이제는 무릅이 깨어져도 안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의심이 생겨서 안됐던 것입니다. 요새 심리학자들도 그런 일을 혹 경험한다고 합니다.

중국에 이강(李廣)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광 사호(射虎)라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광은 본래 힘이 많은 무사로서 중국 역사에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달 밝은 밤에 활 쏘는 연습을 하고 저물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동네 앞에 있는 남산(南山) 근처에 왔을 때인데 큰 호랑이가 자기가 타고 오는 말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광은 「저 놈이 배가 고픈 모양인데 나한테 달려 들면 나도 죽고 말도 죽을 것에 틀림 없다. 도망을 가자니 호랑이가 따라올 것만 같고 죽으나 사나 저놈하고 싸움이나 해 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등에 올라 앉아 활을 호랑이에게 겨누어 정면으로 쏘았습니다. 호랑이는 자기 몸에 활을 맞으면 막 달려들어서 원수를 죽여 놓고나서 죽는 영특한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자기가 소리를 지르면 자기가 탄 천리마가 단 걸음에 자기 집으로 달려 나갈 것이니 동네 앞에 닿으면 큰 소리를 질러서 동네 사람들이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나오면 호랑이가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집에 다 가도록 호랑이가 달려오는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랑이가 정통으로 내 활을 맞고 직사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큰 백호(白虎) 한 마리를 잡았다고 좋아서 밤새도록 잠도 한 숨 못자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호랑이를 잡으면 껍데기는 임금한테 바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고기나 뼈는 귀한 약으로 쓰이므로 큰 횡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새벽녘에 날이 새자마자 지개를 지고 호랑이 죽은 근처에 가서 보니 호랑이가 꼼짝 않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면 그렇지 내 활을 네가 피하겠느냐.」하고 가까이 가 보니 화살이 꽂힌 곳은 큰 바위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내 활 앞에는 이 세상에 감당할 놈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활을 겨누어 다시 한번 바위를 향해 쏘아 봤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역시 부사의인데 이것도 사차원 세계의 힘이 발동된 것입니다. 오관의 힘으로는 화살이 아무리 세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호랑이 뼈가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내 화살이 안들어 갈 수 없다고 자신한 때문이었고,「단지는 뒤집어 놓는 것이다. 아람드리 나무도 내가 집어 던질 수 있는 나무다.」라고 아무 생각없이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 사심(私心)없이 한가지로만 생각하면 이 지구도 뚫고 나갑니다. 내가 경험한 일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마산에 있을 때인데 밤중에 일어나 보니 우리 바로 앞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때는 상주(喪主)일 땐데 상복을 벗어 놓고 불을 끄려고 나가니까 상주가 그런 짓하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먼저 보았으니 가야겠다고 달려 가서 보니 큰집 한 쪽에 불이 붙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고 불은 곧 옆집으로 번지게 생겼습니다. 나는 옆집 지붕에 얼른 올라 가서 「불이야 !」하고 사방에다 대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올라선 그 집은 큰 부자집이었는데, 「이 집에 멍석 있으면 올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멍석이 어찌나 컸는지 약한 사람은 지지도 못합니다. 나는 발이 썩은 집에 미끄러질까봐 한 손으로는 붙들고 내 몸뚱이도 거기 붙어 있을 수 없는 지경인데 한 짐이나 되는 멍석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래서 불붙는 집에 멍석을 쭉 펴놓고 물 가져오라 해서 물을 끼얹어 불이 안 붙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일인데, 급한 사정에 부딪쳐서 이것을 집어던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안된다는 생각없이 던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천만 차원(次元)의 마음의 세계



꿈에도 바위는 무겁고 모래는 가볍고 그렇지만 이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꿈속의 세계에서는 중량이 없는 것인데 바위는 무겁다는 생각 그것이 무거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 그것만 끊어지면 현실 세계를 그대로 초월합니다. 화살이 돌을 뚫고 단지를 뒤ㅂ는 것과 같이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고 오관으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안되지 이 오관 밖에 또 세계가 있고 오관 밖의 사람이 또 무수히 있습니다. 그것이 사차원의 세계에 의해 증명됩니다. 이 육체와 오관 밖에 참나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차원세계란 우리의 모든 잡념이 쉬고 나면 그때는 육체 이대로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서 미국으로 바로 뚫고 나가서 눈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속도는 그렇게 빠릅니다. 마음만 그렇게 가는 게 아니라 육체도 같이 갑니다. 마음과 몸뚱이가 한덩어리이고 물질하고도 하나고 중생하고도 하나입니다. 마음에 아무 생각없는 그 때가 사차원의 시절이며 모두가 하나로 됩니다. 구별이 없고 주객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차원의 세계에도 한없는 층계가 있습니다. 오차원 육차원 천차원 만차원의 세계에 들어선 정신상태에서는 모든사건에 전지전능하게 됩니다. 모를 것도 하나도 없고 안되는 것도 하나도 없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깨달아 놓고 나서 중생제도를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해야 정말 사람 사는 멋을 알게 됩니다





생각을 여읜 마음자리

육체를 나라고 해서 살기 때문에 하루 밥 세 끼 먹다 시간 다 가고 바빠서 쩔쩔맵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 지나면 지금의 백배 천배 바빠집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전부 기계가 다하고 그때는 시간이 없어 밥도 먹을 틈이 없을 지경으로 됩니다. 지금은 태고적이 될 정도로 물질문명이 진보하여, 지나온 오천년 동안 발전한 것보다 몇 배 더한 발전을 해서 달나라 가는 것도 며칠이면 갔다 오고 화성 금성도 금방 갔다 올겁니다. 그런 것들을 발명해 내는 마음자리, 지금 말하는 이것을 확실히 알면 그것이 곧 여래입니다. 내가 말하는 이것은 다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의심합니다.

즉견여래(卽見如來)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가령 마루가에 내가 앉아 있는데 마당에 호랑이 한마리가 왔다고 하면 그 호랑이를 피하려고 안방으로 자꾸 뒷걸음치면서 앉은 채 미끌어져 들어갈 것입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겠으니까 안방이 수백간이나 되는 큰 방이라 치고 맨 아랫목 구석까지 엉덩이를 비비면서 눈으로는 앞에 있는 호랑이를 주시하면서 문턱을 넘어 들어가서 문을 꼭 잠그고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호랑이를 피해서 방으로 자꾸 뒷걸음질치듯이 마음에 모든 생각을 다 내버리고 나면 모든 생각의 주체인 이 마음자리, 기분 이전의 마음자리에 들어가 앉게 됩니다.

생각이란 생각을 다 떼어내고 객관을 세우지 않으면 고스란히 마음자리만 남는데 그 자리에만 앉아 있으면 어떤 귀신도 날 잡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이 와도 안 되고 부처님이 와도 안 됩니다. 모든 생각이 떨어지고 나면 나를 볼 사람도 없습니다. 부처님도 날 못 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통으로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끼리는 서로 못 본다는 말(佛佛不相見)도 그런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못 보는 곳까지 가면 완전한 자기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객관을 보고 무엇을 분별하듯이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안다는 소리는 안다는 말도 아니니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럴 수 있겠다 짐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동서남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이 있어서 중생들은 그것들 한테 이끌리어 지배를 받고 사는데, 크고 작은 그 모든 사건을 다 버리면 마음의 본연 자세에 들어앉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들어앉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한다 생각한다 하다가 생각을 내 버리면, 좋다 나쁘다 하는 기분을 내버리면, 그리고 나서 남는 것은 마음의 본연자세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걸 여래(如來)라 그럽니다.

본심(本心)자리, 마음자리, 이것이 진짜 <나>입니다. 모든 생각의 주체인 자리입니다. 이것이 모든 조화를 부리는 것이며 온 우주에 이 <나>를 안 거친게 하나도 없습니다. 영웅이 되든지 바보가 되든지 일체 사건의 주체입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네 정신만 다소곳이 챙겨라, 거기는 호랑이도 못가고 하느님도 못가고 부처님도 못가는 마지막 자리에 도사리고 앉게 되는 자리다.」 그러면 그때에는「이제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 엉뚱한 데 집착을 했구나」하는 것이 알아집니다.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어 가지고 마음의 본연 자세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련만 근본적으로 끊어지면 잠재의식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육체를 여읜 마음이 부처



이와 같은 미련 . 잠재의식이 업보(業報)라는 것입니다. 이 업만 없어지면 부처님하고 똑같습니다. 지금도 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육체가 나라는 착각을 가지고 이놈이 하루 밥 세 그릇 필요하니까 이것이 사건이 되어 갖고 마음이 복잡해져서 삼십오억 다 잡아 먹고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부모형제를 다 잡아먹어도 내가 살아야 하니 이것이 독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배타고 있다가 물에 빠져보면 압니다. 다 집어 넣고 나 하나만 살려고 하는 지독한 독사가 한 마리씩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밝지 못하다 모른다 소리입니다. 마음이 나지 육체가 내가 아닌걸 모른다, 내 꿈인 줄 모르고 산다는 뜻입니다.

근본적으로 육체를 나라고 하는 것이 근본무명(根本無明)입니다. 그 생각만 놓아 버리면 우리는 사차원 이상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얕은 사차원의 세계에 들어가서 자꾸자꾸 깊이 들어가면 부처님같이 대열반(大涅槃) . 대보리(大菩提)의 여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고 가는데 구애(拘碍)가 없어서 와도 오는게 아니고 가도 가는게 아니며 하루 종일 말해도 한 마디도 하는게 아닙니다. 마음은 그냥 가만히 있습니다. 말하자는 상대가 있으니 말해 주는 것뿐이지 나를 위해 하는 것은 하나도 엇습니다. 나한테 아무 필요도 없는 거니까 해보아도 손해도 이익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는 이것이 불성자리고 마음자리입니다. 이것이 성불(成佛)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탁 내 버리고 살아라. 전 세계 재산 전부 내것 만들어 놓아도 내것 아닙니다. 돈 백만원 모아 놓으면 돈 한장 한장에 내가 구속되는 겁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생명이 구속되는 것이고 좋은 마누라 얻어 놓으면 그 마누라가 완전히 나를 구속하는 겁니다. 현실이란 아무것도 아니어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은 하나도 없는데, 그것을 현실이라고 거기에 의지했다가는 눈에 핏물이 날 일이 생깁니다. 금방 없어질테니까 거기 속지 말고 영원히 자기 생명을 찾자는 겁니다. 그것은 먼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이놈이고 말하는 이 자체 마음을 딱 곤두세워서 듣고 앉아 있는 생각의 주체 그것이 나라는 것입니다. 이 일부터 해놓고 남 도우려고 해야지, 뭐니뭐니 해보아도 소용 없습니다. 무슨 박사가 되어 보아도 박사가 되어서 밥 수월하게 벌어 먹자는 밥 벌이 수단 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밥 먹어 보아야 아무것도 남는 것 없습니다. 아무것도 되는 것도 없는 그걸 현실이라고 하니 그것에 속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대로 살아야 될 걸 알았으니 그래야 분명하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허망한 것은 간직할 것 없다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은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 밖에 없다, 다른건 다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물어지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서 허망을 내 마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 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바빴는가, 내가 이 소리를 하고 또 하는 것은 들을 때 마다 그만큼 긍정하면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생에 못하면 내생에라도 해야 합니다.

남이 다 성불하고 맨 나중에 성불해야 합니다. 성불해야 안심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어디로 가나 고통 입니다. 천당을 가나 극락을 가나 높은 것 낮은 것 다 있습니다. 이 마음을 깨쳐 놓고 나면 나 보다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고 그러니 평등의 세계입니다. 거기는 시기 질투도 없고 사람 만나면 서로 부처니까 서로 반갑고 치하를 하고 지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실다운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객관을 다 떨어 버리면 그러면 여래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한 것입니다.





마음에서 여래를 찾아야



이 우주 허공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공간은 그것이 생명이 없고 무한대 무기체(無機體)입니다. 또 이 지구덩이가 생명이 없으니 그게 행동을 못하고 생각을 못합니다. 지구가 자전 공전하는 것이 제가 하는 것 아니고 자전 공전 안하면 않되게 되어 있는 피동(被動)이고 자동(自動)이 아닙니다. 그러니 물질계도 생명이 없고 허공계도 생명이 없는 거라면 그러면 우주객관에 생명이 없는 겁니다. 생명은 지금 말하고 듣는 이것 밖엔 없습니다. 그러니 이건 내 생명이면서 전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우주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이고 물질도 허공도 아닙니다.



무기물질(無機物質)이 유기물(有機物)로 화한다는 것은 과학이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무기물질이 유기물질로 화했다는 건 허공이 바윗돌로 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될 수 없는 입입니다. 같은 이치로 무기물질이 세포로 되었다 해서 생명으로 화할 수 있다는 건 허공이 바윗돌이 됐다는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현상계에서 생명을 찾을 수 업고 그것은 다 마음의 그림자이며 마음이 곧 여래이니 여래는 오직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