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2.

하안거 해제법어-해인사 가야총림-효봉스님-1948년(戊子年) 7월 15일

1948년(戊子年) 7월 15일
하안거 해제법어-해인사 가야총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그 발 밑에 하늘 뚫을 한 가닥 활로[一條通天活路]가 있는데. 여기 모인 대중은 과연 그 길을 밟고 있는가? 아직 밟지 못했다면 눈이 있으면서도 장님과 같아 가는 곳마다 걸릴 것이다. 보고 들음에 걸리고 소리와 빛깔에 걸리며 일과 이치에 걸리고 현묘(玄妙)한 뜻에도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그 길을 밟으면 이른바 칠통팔달(七通八達)이요 백천가지를 모두 깨달아 밝히지 못할 것이 없고 통하지 못할 이치가없을 것이다.

한참 있다가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 길[一路]을 밟고자 하거든 이익이 있거나 없거나 시장(市場)을 떠나지 말라. 이제부터 대중을 위해 용심(用心)할 곳을 지시하리라.
우선 선조 보리달마(菩提達摩)존자는 인도로부터 중국에 오셔서 오직 한 마음[一心]을 말씀하시고 한 법[一法]을 전하셨다. 부처로써 부처를 전하신지라[以佛傳佛] 다른 부처를 말하지 않으셨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신지라[以法傳法] 다른 법을 말하지 않으셨다. 그 법이란 말로 할 수 없는 법이요, 그 부처란 취(取)할 수 없는 부처이니 그것은 곧 본원 청정한 마음[本源淸淨心]이다.
그러므로 오늘 밤에 내 설법을 듣는 대중으로서 만일 이 마음을 밝히고자 한다면 다른 여러 가지 불법(佛法)을 배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만 구하거나 집착함이 없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집착함이 없으면 마음이 멸하지 않을 것이니, 생멸(生滅)이
없는 그것이 바로 부처이니라.
부처님이 사십오 년 동안 말씀하신 팔만사천 법문(八萬四千法門)은 팔만사천 번뇌(煩惱)를 상대한 것이니, 번뇌를 떠나면 그것이 곧 법이요, 떠날 줄 아는 그 놈이 곧 부처다. 모든 번뇌를 떠나면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일 묘한 비결을 알고자 한다면 오로지 그 마음에 한 물건도 구하거나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
무릇 부처의 참 법신(法身)을 허공(虛空)과 같다고 비유하였지만 사실은 허공이 곧 법신이요, 법신이 곧 허공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신이 허공계에 가득하여 그 허공이 법신을 포용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법신이 비어서 밝게 나타나니 공하되 공한 것이 아니요, 공하지 않되 공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다.
만일 허공이 따로 있다고 하면 그 허공은 곧 법신이 아니요, 법신이 따로 있다고 하면 그 법신은 곧 허공이 아니다. 그러므로 허공이라거나 법신이라는 견해를 가지지 말라. 허공이 바로 법신이며 곧 허공이기 때문이다.
허공과 법신의 모양이 다르지 않고 부처[佛]와 중생(衆生)의 모양이 다르지 않으며,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의 모양이 다르지 않고 번뇌(煩惱)와 보리(菩提)의 모양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온갖 모양을 떠나면 그것이 곧 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이니라.
범부(凡夫)는 경계를 취(取)하고 도인(道人)은 마음을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옳지 않다. 마음과 경계를 잊어버려야 그것이 곧 참 법[眞法]이다. 경계를 잊기는 쉽지만 마음을 잊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런데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흔히 마음은 버리지 않고 먼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모색할 것이 없는 곳에서 공이 본래 공도 아닌 그것이 일진법계(一眞法界)임을 모르고 있다.
이 신령스런 각성[靈覺性]은 본래 허공과 그 수명이 같아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느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아니다.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며, 방소(方所)도 없고 끝도 없으며,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어서 지혜로도 알았다 할 수 없고 말로도 통했다 할 수 없으며, 경계로도 얻었다 할 수 없고 힘으로도 미칠 수 없다.
그것은 삼세 제불보살(三世諸佛菩薩)과 일체 중생이 다 같이 지닌 대열반의 성품[大涅槃性]이다.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법이니, 한 생각이라도 진실을 떠나면 그것은 모두 망상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구할 것이 아니요, 부처로 부처를 구할 것이 아니며, 법으로 법을 구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단박에 무심(無心)하면 말없는 가운데 도에 계합할 것이다.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삼학(三學)으로써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요문[성불작조요문]을 삼는다. 그러나 그 삼학(三學)의 문은 탐욕과 분노와 우치의 삼독[貪瞋癡三毒]을 없애기 위해 방편으로 세운 것이다. 본래 삼독의 마음이 없거늘 어찌 삼학의 문이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조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은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한 모든 법은
온갖 분별심을 없애기 위해서다.
내게는 이미 분별심(分別心)이 없거니
그 모든 법이 무슨 소용 있으리.

또 옛 사람은, '비구(比丘)가 비구법(比丘法)을 닦지 않으면 삼천대천세계에 침 뱉을 곳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산승(山僧)은 비구니(比丘尼)들을 위해 다시 한 말 하리라. 비구니가 비구니법(比丘尼法)을 닦지 않으면 지금부터 오백 년 뒤에는 이 땅에 부처님 그림자도 없어지리라.

이내 법상에서 내려 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