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戊戌年) 12월 1일
동안거 반산림 법어-동화사 금당선원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오늘이 반산림(半山林)인데 어찌하여 반산림인가. 공부(工夫)가 반인가, 구십 일(九十日)중에 사십오 일이 반인가. 공부가 반이라 하는 사람은 문안으로 들어오고, 사십오 일이 반이라 하는 사람은 문 밖으로 나가라.
공부가 안 되는 것은 머리 때문이니 머리를 베어 나에게 맡기라. 잘 간직해 두었다가 칠통(漆桶)이 타파된 뒤에 돌려주리라.
대중이 말이 없자 이르시기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머리를 다 베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머리를 베고 삶은 찾는 것은 옳지 않다[斷頭覓活不是]'하였으나, 금일 효봉(曉峰)은 머리를 베었음에 삶을 찾는 것이 옳다 하리니, 그 거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오늘 머리 없는 놈이 내일에는 머리 둘 달린 부처[今日無頭漢 明日兩頭佛]이니라. 어떤 것이 머리 둘 달린 부처[兩頭佛]인고?
납월 팔일을 기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는데 경책(警策)을 기다리지 말라. 어느 여가에 경책을 기다릴 것인가. 옛날 나옹(懶翁)스님은 칠일 용맹정진을 하실 때 가시나무로 담을 둘러싸고 알몸으로 그 속에서 정진하여 본분사(本分事)를 요달(了達)하셨으니, 대중도 신명(身命)을 다하여 용맹정진하라.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언제 어디서나 실(實)답게 참구(參究)하고 실(實)답게 깨달으라' 하였으니,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계(戒)가 없이 혜(慧)만 닦으면 건혜(乾慧)이므로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戒)․정(定)․혜(慧)․삼학(三學)은 고불(古佛) 고조(高祖)의 출입문(出入門)이므로 이 길이 아니면 외도법(外道法)이다. 또 정중(定中)에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사람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것이고, 정력(定力)이 없으면 화두가 자주 끊어진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아난존자(阿難尊者)에게 말씀하시기를, '백년 동안 혜(慧)를 배우는 것이 하룻동안 정(定)을 익히는 것만 못하다[百年學慧 不如一日習定]'고 하셨으니, 부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정중(定中)에 화두를 투철히 깨쳐야만 생사(生死)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정력(定力)이 없는 혜(慧)는 공중의 누각(樓閣)과 같다. 근래(近來) 누구누구 하는 스님들이 입적(入寂)할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은 다 정력(定力)이 없기 때문이다. 정력(定力)이란 모든 번뇌를 끊는 칼이다. 그러기에 달마대사는 밖으로 모든 반연을 끊으라고 하였으니, 대중은 자기 마음을 돌이켜보아 힘껏 정진하여라.
게송을 읊으시되,
두 갈래에 떨어지지 말고
발 붙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문득 위치 없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이것이 본래의 너니라.
不落二邊去타가 到無着脚處하여
忽逢無位人하면 正是本來汝니라
옛날 몽산화상(蒙山和尙)이 말씀하시기를, '상근(上根)은 칠 일(七日)이요, 중근(中根)은 한 달이며, 하근(下根)은 석 달이면 깨친다. 내 말대로 힘써도 깨치지 못하면 그대를 대신해서 내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 모인 대중도 생사(生死) 두 자[二字]를 떼어놓고 전력을 기울이라. 일 년에 오직 한 번뿐이니 이날을 지나가면 몸과 마음이 풀어질 것이다. 최후의 힘을 쓸지니라.
주장자를 세 번 울리고 자리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