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2.

상당법어-해인사 가야총림 -효봉스님-1949년(己丑年) 9월 1일

1949년(己丑年) 9월 1일
상당법어-해인사 가야총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경에 말하기를 '내 가르침은 이자(伊字: ∴ )의 세 점[三點]과 같나니, 첫째는 동쪽을 향해 한 점[一點]을 찍어 모든 보살의 눈을 뜨게 하고 둘째는 서쪽을 향해 한 점을 찍어 모든 보살의 수명을 찍고, 셋째는 위쪽을 향해 한 점을 찍어 모든 보살의 머리를 찍느니라'하였다.
석가 세존의 교의(敎意)는 그렇지만, 이 산승(山僧)의 선의(善意)는 그렇지 않다. 즉 동쪽을 향해 한 점을 찍고서는 모든 보살의 눈을 멀게 하고, 서쪽을 향해 한 점을 찍고서는 모든 보살의 목숨을 끊고, 위쪽을 향해 한 점을 찍고서는 모든 보살의 머리를 떨어지게 하리라. 이미 정령(正令)이 있으므로 곧 시행(施行)해야 하리니, 오늘 이 산승은 대중의 머리에 한 점을 찍으리라.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한 번 울리고 한참 있다가 이르시되,
 
아주 영리한 사람이면 이 한 말에 단박에 그 근원(根源)을 알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산승(山僧)은 명리(名利)를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하러 왔는가. 다만 그 사람을 얻기 위해서이다. 여기 모인 대중 가운데 주장자를 가로 메고는 풀을 헤치고 바람을 거스르면서 동서남북을 마음대로 행각(行脚)하고 돌아다니는 납자가 있으면 말해 보라. 과연 본래의 전지[本來田地]를 밟아 보았는가. 만일 그러지 못했다면 헛되이 살다가 허망히 죽는 것이다. 대개 사문 석자(沙門釋子)는 있는 것도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니, 어디로 가든지 범성(凡聖)과 평등하고 해박(解縛)과 평등해야 비로소 조금 상응(相應)이 있을 것이다.
과거 여러 스님들의 문정(門庭)의 시설은 제각기 다르지만 학인(學人)을 지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모두 친절(親切)했다. 그 중에서 가장 친절한 이가 상세(上世)에는 육조(六祖) 스님이요, 중세(中世)에는 조주(趙州) 스님이며, 하세(下世)에는 보조(普照) 스님이니, 이상(以上) 삼가(三家)의 친절한 언구(言句)를 말해 보리라.
육조(六祖) 스님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 어떤 제자가 물었다.
'화상께서 지금 가시면 언제 돌아오시겠습니까?'
스님은 답하기를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갔으니 올 때는 말이 없으리라[葉落歸根 來時無口]'고 하셨다.
조주(趙州) 스님은 어떤 중이 그에게 '개한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스님은 '무(無)!'하고 대답하였다.
또 보조(普照) 스님은 어떤 중이 그에게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환불(幻佛) 말이냐, 진불(眞佛) 말이냐?'라고 되물었다. '부처에도 환진(幻眞)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어떤 것이 환불입니까?'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이니라.' '어떤 것이 진불입니까?' '그대가 바로 진불이니라.'
이상이 모두 가장 친절한 언구(言句)이니, 그러므로 이 산승은 상세(上世)로는 육조를 섬기고 중세(中世)로는 조주를 섬기며 하세(下世)로는 보조를 섬긴다. 이 산승의 법량(法量)은 그분들에 비해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친절이란 두 자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손색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대중이 법을 물을 때에는 반드시 친절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야만 그 대답도 또한 친절할 것이다. 실답게 참구하고 실답게 깨치어라.
 
법상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