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己丑年) 10월 15일
동안거 결제법어-해인사 가야총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이번 겨울 결제[冬結制] 구십 일 동안에 대중 각자가 만일 일을 마치지 못하면 맹세코 머리를 끊어야 하리라. 이 일[此事]을 두고 말한다면 길면 구십일(九十日)이요 짧으면 칠 일(七日)이니라.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는 비밀이 있으니, 그것은 빽빽하여 틈이 없고 미세한 티끌도 일지 않는다. 그때에 있어서는 은산(銀山)이요 철벽(鐵壁)이라, 나아가려 해도 문이 없으며 물러나려 해도 길이 없도다. 만 길의 깊은 구렁에 떨어진 것 같아서 사면이 다 벼랑이니라. 만일 그가 용맹스런 장부라면 이렇다 저렇다 물을 것 없이 곧 몸을 뒤쳐 뛰어나올 수 있겠지만, 한 찰나라도 머뭇거리면 부처도 그를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그 중에는 참선한다 자칭하고 방석에 앉아 졸음과 망상 속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으니, 그는 한갓 세월만 허송할 뿐 아니라 시주의 시물(施物)도 소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이 모임에 그런 무리가 있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 내쫓아 활인(活人)의 콧구멍에 악취(惡臭)가 들어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좋은 의사[良醫]는 병을 다스릴 때 먼저 그 근본을 진단하는 법인데, 그 근본을 알게 되면 무슨 병이든지 다 고칠 수 있다. 우리 형제들 중에는 주장자를 가로 메고 풀을 헤치고 바람을 거스르면서 십 년 내지 이십 년을 돈독히 믿고 하나[一]를 닦으면서 생사(生死)를 밝히지 못하는 이가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그 근본(根本)을 찾아내지 못한 데 있다.
너와 나라는 분별은 바로 생사의 근본이요, 생사(生死)는 너와 나라는 분별의 지엽(枝葉)이다. 이 지엽을 없애려면 먼저 그 근본을 없애야 하는 것이니 근본이 없어지면 어떻게 지엽이 있을 수 있겠는가.
둘째는 하나의 큰 보배 창고[一大寶藏]가 그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전연 모르는 데 있다. 이 보배 창고는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의 믿음[信]이라는 한 글자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것을 믿으면 큰 실수가 없겠지만 그것을 믿지 못하면 아무리 여러 겁을 지내더라도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다.
또 경학(經學)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 하리라. 무릇 경론(經論)을 공부하는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을 세간법(世間法)에 비하면, 의학자는 병원을 차려 놓고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에 그 목적이 있고, 사업가는 갖가지 사업을 경영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으며, 법학자는 행정이나 사법으로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불조(佛祖)의 어록(語錄)을 공부하여 불조가 되는 문에 들어가 실천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으니, 그같이 하면 학인과 교수가 다 이롭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과 타인을 다 속이는 일이다.
주장자를 들고 말씀하시기를,
부처의 참 법신[眞法身]은 허공과 같아서 사물(事物)을 따라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마치 물 속의 달[水中之月]과 같다.
법상을 한 번 울리고 나서 이르시기를,
석가 늙은이[釋迦老人]가 오셨다. 대중은 보는가?
다시 법상을 한 번 울리고 이르시기를,
일대장교(一大藏敎)를 한 말로 다 말했는데 대중은 들었는가? 이 언구(言句)를 진실로 보고 진실로 들으면 그밖에 딴 일이 없느니라. 그러나 천리 밖을 다 보려면 다시 한 층의 누각[一層樓]에 올라가야 한다. 대중에게 묻노니 그 한 층 누각이 어디 있는고? 대중은 정신을 바짝 차리라!
법상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