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법어
법사에 올라 주장자를 번쩍 드시고 말씀하시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본래 결제도 없거니 어찌 해제가 있을꼬!"
법상을 세번 치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알겠는가?" 산간에 명월이요, 강상에 청풍이로다. 이제 대중은 90일 동안 참선학도 하였으니 깨친 바가 무엇인가 한번 일러 보라."
참선 학도 뿐 아니라 일체 중생은 귀천과 노소냠녀와 이둔고하(利鈍高下)의 차별을 막론하고 모두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그 명상(名相)이 다를뿐 근원은 똑 같아서 평등하고 원융하다. 그러나 불조와 선지식과 남자들의 깨치고 증득함에, 더디고 빠르고 어렵고
쉽고 깊고 옅음이 있는 것은 무량겁을 두고 닦고 익혀 온 그 원력과 업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언하(言下)에 깨치고, 어떤 사람은 회광반조하여 하루 안에 눈을 뜨고, 또 어떤 사람은 며칠 혹은 몇 달 몇 년만에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둔하고
게으른 자는 죽을 때까지도 못 깨친채 금생을 하직하고 만다. 이 어찌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니냐. 금생에 다행히 불법을 만났으면서 닦지 않고 게을리 허송 세월하여
미끄러져 버린다면 다시는 더 붙잡을 기약이 없으리라. 그러니 이번 동안거에도 소식이 없는 이는 해제를 못한 것이다. 발분하고 발분하라. 금생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어느 생을 기약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들은 교단 안팎을 물론 하고 눈 밝은 지혜인을 갈구하고 있다.
용기 있는 선지식을 부르고 있다. 신념있는 행동인을 아쉬워 하고 있다.
어서 나서라, 무엇들을 하고 있느냐. 무명 중생들의 저 구원의 절규가 들리지 않느냐.
묘도진리(妙道眞理)는 역력하고 분명하여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대로 드러났다.
옛 사람은 이같이 읊었느니라.
산하 대지에 내린 한 조각 눈
햇빛이 비추니 자취없이 스러졌네
이로부터는 불조를 의심치 않으니
남북과 동서가 어디 있으랴
주장자를 세우시고 말씀 하시었다.
"여인등산(如人登山)에 각자노력(各自怒力)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