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알아차리는 법 (수행법문)- 우 소바나 사야도
모곡 센터 우 소바나 사야도 ( U Sobhana Sayadaw)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있어서 밖에서 들어오는 대상 5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이 6가지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恒常)하는 대상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밖[外]에서 들어오는 마음은 다섯 가지입니다.
1. 보는 마음 [眼識]
2. 듣는 마음 [耳識]
3. 냄새 맡는 마음 [鼻識]
4. 맛을 아는 마음 [舌識]
5. 몸을 아는 마음 [身識]
둘째, 안[內]에서 생기는 마음은 여섯 가지입니다.
1. 탐욕이 있는 마음 [貪心]
2. 성냄이 있는 마음 [嗔心]
3. 어리석은 마음 [癡心]
( 이상은 불선의 대표적인 마음으로 탐(貪), 진(嗔), 치(癡)를 말합니다.)
4. 탐욕이 없는 마음 [寬容]
5. 성냄이 없는 마음 [慈愛]
6. 어리석지 않은 마음 [智慧]
( 이상은 선의 대표적인 마음으로 관용(寬容), 자애(慈愛),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셋째, 항상(恒常) 있는 마음은 두 가지입니다.
1. 들숨의 마음
2. 날숨의 마음
여기서 마음이란 뜻은 마음의 본성을 아는 것입니다.
안식(眼識)은 눈에서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보는 마음이란 볼 때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식(耳識)도 귀에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비식(鼻識)은 코에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이고, 설식(舌識), 신식(身識)은 입과 몸을 통해서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18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육근(六根. 안, 이, 비, 설, 신, 의)이 육경(六境. 색, 성, 향, 미, 촉, 법)에 부딪쳐서 육식(六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을 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 조건들이 부딪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촉입니다. 이런 촉에 의해 식이 성립됩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앞선 마음을 뒤에 있는 마음이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여기에 컵이 있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 이것이 컵이구나.’ 하고 앞선 마음이 있고, 뒤에서 다시 이 앞선 대상을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한꺼번에 같이 일어나지 않고 한 순간에 하나만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대상이 있을 때(일어났을 때)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다시 대상이 있는 것을 뒤에 일어난 마음이 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있는 것을 알고’를 하는 것은 ‘앞에 마음이 있고’, ‘뒤에 마음이 있고’를 하면서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대상이 있고 알고’, ‘있고 알고’를 거듭하는 것이고 이것은 ‘앞에 마음’, ‘뒤에 마음’을 거듭하여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볼 때는 사마디(samaadhi. 집중)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마디가 있으므로 해서 앞선 마음을 뒤에 마음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집중력이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을 때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식이나 비식이나 설식이나 신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대상을 알고 보면 보는 것을 알고 다시 뒤에서 이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안[內]에서 생기는 마음에서 첫째, 탐욕이 있는 마음을, 욕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두어야 하고, 이 마음은 바람직한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보아야 합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관용), 성냄이 없는 마음(자애), 어리석지 않은 마음(지혜)을,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외부에서 방문하는 의식과 내부에서 생기는 의식이 없을 때는 들숨과 날숨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들숨과 날숨을 볼 때는 ‘들숨이 들어오고 없고’, ‘날숨이 나가고 없고’입니다.
( 호흡의 경우 코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들숨과 날숨으로 이해하고, 가슴이나 배의 호흡은 일어나고 꺼지는 것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호흡은 ‘일어남이 있고 휴지부가 있고, 다시 꺼짐이 있고 휴지부가 있고’가 반복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들숨이 들어오고 없고’, ‘날숨이 나가고 없고’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의 ‘없고’ 라는 것은 일어남이 있고 사라진 것을 말하며, 또한 일어남이 있었다가 사라진 뒤에 쉼(휴지부)이 있는 것을 ‘없고’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모든 대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마음도 함께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대상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데,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없고, 알고 없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념처(思念處 satipatthaana)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마음의 대상(法)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사념처 중에서 마음을 본다고 말할 때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지 알아차리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알고 보고, 알고 보고 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담마누빠싸나(法念處 dhammaanupassanaa)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고, 지적(知的)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찌따누빠싸나(心念處 cittaanupassanaa), 즉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셨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수다원과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많이 보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마음이 하는 것이므로 마음을 보는 것으로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념처에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본다고 하는 것은 이것과 다르게 마음 그 자체의 본성을 대상으로 보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몸을 볼 수도 있고, 느낌, 생각, 행위를 볼 수도 있는데 이때도 본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고 이것도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마음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아는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으로써의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본다’고 하는 표현은 한문으로는 관(觀)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look, see 등등 많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대상을 마주할 때 눈으로 맞이하는 것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고 대표적이라서 본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에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대상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직관(直觀)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용어로써 ‘본다’는 말을 사용하고 또한 실제로 눈으로 대상을 제일 많이 보기 때문에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차림을 할 때는 ‘본다’는 용어에 익숙하여 마음으로 대상을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마음으로 대상을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실제로 눈으로 보려고 애를 쓰다 두통이나 상기가 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뿐더러 특히 마음을 보는 경우에는 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물질을 대하는 개념으로 알기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에는 본다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특별하게 ‘마음을 본다’고 말할 때는 ‘본다’라고 하지 않고 ‘마음을 알아차린다’ 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음을 알아치리는 과정에서 문제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수다원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많이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씀은 수행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경우에 수행자들이 처음에 마주하는 대상을 몸이라는 물질이나 마음의 작용인데 수행의 진전에 따라 이런 대상들이 사라져 버리면 남는 것은 마음만 남습니다.
이때 몸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고, 알아차릴 대상이라고는 아는 마음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앎'을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아는 마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숙지되지 않은 수행자는 헤매게 되고 장애가 일어나거나 수행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일어나는 대상의 뿌리를 알게 되어 본질적인 것에 접근하여 지혜가 나게 하며, 마지막에서 무사하게 수행을 계속하게 되는 힘이 되기 때문에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사마디가 성숙되어야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수행을 하려면 먼저 호흡과 몸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충분히 거치고 마음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이번에는 안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에서 방문하는 손님은 탐심, 진심, 치심과 무탐심, 무진심이 있고 무치심이 있는데 무치심은 어리석지 않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수행 중에 때로는 탐심이 생깁니다. 이때 수행자는 탐심이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탐심이 사라질 때까지 보셔야 합니다.
(무탐심은 관용(寬容)이고 무진심은 자애(慈愛)이고 무치심은 지혜(智慧)입니다. 지혜는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탐심은 불선(不善)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불선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은 선한 마음입니다. 즉 선하지 못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선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알아차림은 행으로써 선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어떤 대상이나 대상에 불순한 것이 붙지 못하도록 마음을 보내는 것이 알아차림(sati)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마음을 보내면 다시 마음이 이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알 수 없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선한 마음이 새로 일어나면 기존의 불선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효능입니다.)
탐심이 사라지고 난 후에 대상이 없으면 몸 전체를 알아차리십시오. 어느 곳에서든지 마음이 일어나서 몸의 어느 부분으로 마음이 가지는 곳이 있거나, 또는 다른 느낌이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대상이므로 알아차리십시오.
만약 아픈 곳이 있다면 아픈 곳을 알아차리면서 아픔을 주시하십시오. 그리고 아픔이 사라지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면 그 망상을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에 다른 대상이 없다고 알아차림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 몸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습니다. 소리나 다른 두드러진 대상을 알아차리시고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듣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다른 대상을 알아차리십시오.
때로는 지루한 마음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지루한 마음은 치심(癡心)입니다. 이때도 지루한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십시오. 이렇게 계속해서 알아차리다 보면 일어나는 것 역시 마음이고 사라는 것 역시 마음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대상을 주시함으로써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되면 여러분의 집중력이 더 좋아집니다.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알고를 하게 되면 계속해서 아는 마음만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앞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뒤의 마음이 계속 알아차리는 것을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곡사야도 수행방법은 첫째는 집중력(사마디)을 높이기 위해서 대상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로 집중력이 좋아진 다음에 대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곡 방법은 처음에는 코의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림을 계속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렇게 직접 자신의 몸에서 알아차릴 때는 지혜(智慧. pa~n~naa)와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이 함께 했을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어남과 사라짐은 '나'라고 하는 자신이 아니고, 단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아만심, 유신견이 없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고 알았을 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어남이 고(苦)이고 사라짐 역시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 뿐이라는 것을 알고 고(苦)를 숙고함으로써 팔정도 중에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를 하게 됩니다. 정견과 정사를 숙고하여 지님으로써 열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처음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고 알고 하십시오. 오직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 내가 있다는 생각을 제거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통해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로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우 소바나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을 묘원 법사님이 정리하셨고, 그 법문 중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에 대해서만 발췌하였습니다.)
*출처-호두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