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2.

하안거 해제법어-해인사 가야총림-효봉스님-1949년(己丑年) 7월 15일

1949년(己丑年) 7월 15일
하안거 해제법어-해인사 가야총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우리 형제들이여, 결제한 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십 일(九十日) 동안 승두(繩頭)를 굳게 잡고 힘줄이 끊기고 뼈가 부서지도록 한바탕 애를 써서 모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밝아 모든 번뇌가 끊어 졌으리라. 그러나 투철한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은 바로 땅을 파서 하늘을 찾는 것이며,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는 것이니 그릇되고 그릇된 짓이다.
 
한참 있다가 이르시되,
 
'만일 그릇되지 않은 길을 밟으려거든 막야(막야) 보배 칼을 빼어 수미산(須彌山)을 잘라버리고 다시 북두(北斗)를 잡아서 낮종을 쳐라'하시고 주장자를 들고 좌우에 물으시기를,
 
'이것이 무엇인고?'
 
어떤 중이 '주장자 입니다.' 하자 스님은 '주장자만 알고 이 산승의 뜻은 모르는구나' 하고는 곧 주장자를 세우고 이르시기를,
 
이것이 즉(卽)하여 작용한 것인가, 여의고 작용한 것인가? 어묵동정(語黙動靜)을 여의지 않고 한 마디 일러 보라. 어묵동정을 떠나서 한 마디 하기는 쉽거니와 어묵동정을 떠나지 않고 한 마디 하기는 참으로 어려우니라.
 
대중이 말이 없자 곧 이르시되,
 
토끼뿔 지팡이를 거꾸로 짚고 무위(無爲)의 산을 돌아다녀야 비로소 될 것이다.
 
결제(結制) 당시에 이르기를 금불(金佛)은 용광로에 견뎌내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에 견뎌내지 못하며, 토불(土佛)은 물에 견뎌내지 못한다 했다. 용광로에 들어가 도 녹지 않고 불어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풀리지 않는 불상(佛像)을 이번 여름 안거 구십 일 동안에 각자 조성(造成)했으리라 믿는다.
이 산승은 그 불상을 봉안(奉安)할 법당(法堂)을 건축하기 위하여 사월 십육일에 기공(起工)해서 칠월 십사일에 준공(竣工)하였으니, 만일 대중이 그런 불상을 조성하였거든 점안(點眼)하여 봉안하도록 하라.
 
대중이 말이 없자 이르시기를,
 
만일 조성하지 못했다면 주먹으로 금강산(金剛山)을 때려 무너뜨리고 입으로 동해수(東海水)를 단번에 마셔버려야 비로서 되느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곧 마음이 부처[卽心是佛]이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미물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佛性)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동일한 심체(心體)이니라. 그러므로 고조(高祖) 달마(達摩)대사가 서천(西天)으로부터 와서 오직 일심(一心)의 법을 전하시면서 중생들을 가리켜 본래 부처[本來是佛]라 하신 것이다. 지금 자심(自心)을 알고 자성(自性)을 구할 것이요, 새삼스레 따로 다른 부처를 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자심을 깨우쳐야 하는가. 지금 말하는 이것이 곧 자심이니, 말도 하지 않고 또 동작도 하지 않으면 그 심체(心體)는 허공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장소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전연 없는 것이 아니고 있어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조사는 '진성(眞性)을 심지(心地)에 감추었음이여, 참 심성(心性)은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구나. 그러면서 인연(因緣)을 따라 중생을 교화하니 그것을 방편으로 지혜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인연을 따르지 않을 때에도 있다 없다라고 말할 수 없고, 인연을 따를 때에도 또한 그 자취가 없는 것이니, 이미 그런 것임을 알았다면 부처가 있는 곳에도 머물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도 빨리 지나가거라. 이것이 곧 모든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집착이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체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그 뜻이 내닫는 마음을 반연(攀緣)하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쉬지 않고 육도(六途)를 돌아다니면서 갖가지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마음이 생기면 모든 법이 생기고[心生卽種種法生],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다[心滅卽種種法滅]고 하신 것이다.
모든 법은 다 마음으로 된 것이다. 심지어 지옥이나 천당도 모두 마음으로 된 것이니, 만일 지금 무심(無心)을 공부하여 온갖 인연을 죄다 버리고 분별 망상을 내지 않으면 거기는 천당도 지옥도 없어며, 너도 나도 없고 탐욕도 성냄도 없고, 미움도 사랑도 없다. 취함도 버림도 없어서 본래 청정한 자성이 바로 나타날 것이니, 그것이 곧 보리의 법[菩提法]을 기르는 것이다.
만일 이 뜻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널리 배우고 많이 듣고 부지런히 수행하면서 풀뿌리와 나무 열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송락(松落)과 풀옷으로 그 몸을 가리더라도 그는 사도(邪道)를 행하는 사람이라 끝내는 천마(天魔)나 외도(外道)가 되고 말 것이다.
그 마음이 항상 산란하여 안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삼승(三乘)․사과(四果)․십지(十地)를 다 배워 알더라도 그는 아직 범부의 자리에 앉아 모든 행이 다 무상(無常)으로 돌아가고 그 힘이 다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헝공을 향해 쏜 화살이 그 힘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그들도 각각 생사의 윤회로 돌아갈 것이니, 이런 수행은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고통만 받을 것이다.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오늘과 같은 해재(解制)하는 날에 옛 사람은 말하기를 '아득한 만리 한치 풀도 없는 곳을 향해 가라[向萬里無寸草處去]'라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한참 있다가 이르시기를,
 
보고 듣고 깨닫고 앎[見聞覺知]에 걸림이 없나니
빛깔과 소리와 맛과 감촉[色聲味觸]이 언제나 삼매(三昧)로다.
 
법상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