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己丑年) 6월 1일
하안거 반산림 법어-해인사 가야총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여기 모인 대중들이여, 사월 보름 결제(結制)할 때 우리는 같은 마음과 같은 걸음으로 구십(九十) 일 동안 십만 팔천 리(十萬八千里)즐 줄곧 달려가기로 서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노소(老少)의 차별이 있고 남녀(男女)의 차별이 있으며, 근기(根機)의 차별이 있고 더디고 빠른 차별이 있어, 어떤 이는 백리(百里)를 채우지 못하고 어떤 이는 몇백 리를 갔으며, 어떤 이는 몇천 리(千里)를 갔고 어떤 이는 몇만 리(萬里)를 갔으며 어떤 이는 이미 십만 팔천 리에 도달했을 것이니, 작자는 모두 자기 발밑을 향해 점검(點檢)해 보라.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한 번 울리고 말씀하시기를,
비록 방망이 끝에서 모두 깨닫더라고 덕산(德山)스님을 등진 것이며,할[喝] 밑에서 모두 알아차리더라도 임제(臨濟)스님을 매장하는 것이어늘, 하물며 되는 대로 찌껄여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평할 수 있겠는가. 이 산승(山僧)은 입이 어눌하고 대중은 눈이 희미하거늘, 설령 그 귓가에 향수
해(향수해)를 가져다 쏟고 그 눈앞에 수미산(須彌山)을 가져다 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참 있다가 게송을 읊으시되,
천만 번 이리저리 가꾸고 다듬은들
어찌 그 천진(天眞)의 모습을 보기만 하랴
뿔난 사자는 발톱이 쓸데 없고
여의주(如意珠) 지닌 용은 그물에 걸림 없느니라.
이와같이 반산림 법문(半山林法門)을 마치고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또 옛 사람의 예를 들어 대중들과 함께 생각해 보리라. 옛날 어떤 중이 한 노 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 그 노 스님이 별안간 허공을 향해 침을 두 번 뱉었다. 중이 그 침 뱉는 뜻을 물었더니, 노 스님은 '고요한 가운데서 갑자기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침을 뱉었다'라
고 하였다.
대중이 만일 그때 거기 있었다면 그 노스님의 그 행동을 그대로 보아 넘겼겠는가? 혹은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대중은 각자 일러보라.
대중이 말이 없자 말씀을 이으시기를,
만일 이 산승이 그 중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스님, 다시 한 번 침을 뱉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요함은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도를 배우는 사람은 한 찰나라도 생사(生死)를 헤아리면 곧 마도(魔道)에 떨어질 것이요, 한 찰나라도 어떤 견해를 일으켜면 외도(外道)에 떨어질 것이다. 생(生)이 있음을 보고 멸(滅)로 나아가려 하면 곧 성문도(聲聞道)에 떨어질 것이요,
생이 있음은 보지 못하고 멸이 있음만을 보면 곧 연각도(緣覺道)에 떨어질 것이다.
법(法)이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이제 와서 또한 멸함도 없는 것이니, 두 가지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이 모든 법이 오직 마음임을 알아야 비로소 불승(佛乘)에 계합(契合)하게 될 것이다.
범부들은 다 경계를 따라 마음을 내고 그 마음은 좋고 싫음을 따른다. 그러므로 만일 경계를 없애려면 먼저 마음을 잊어야 하나니,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비고 경계가 비면 마음이 멸한다. 마음을 잊지 않고 그 경계를 없애려 하면 그 경계를 없애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마음만 어지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법은 오직 마음에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도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무엇을 또 구하겠는가.
여기 모인 대중들이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거든 먼저 어떤 경계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경계, 즉 모든 부처님이 와서 맞이한다거나 내지 갖가지 길상(吉相)이 앞에 나타나더라도 그 마음이 그것을 따라가지 않아야 하며 어떤 나쁜 경계, 즉 나찰(羅刹)이나 아귀 등 흉상(凶相)이 앞에 나타나더라도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된다면 그는 온 법계에서 대자유(大自由)를 얻어 어떤 일에도 걸림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화엄경(華嚴經)의 도리이며 삼세(三世) 부처님의 안심입명(安心立命)한 경지이며, 여기 모인 대중의 안심입명할 곳이다. 이밖에 또 무슨 별다른 일이 있겠는가.
만약 참선(參禪)을 말한다면, 온전히 살고 온전히 죽는 이는 빠르고, 반쯤 살고 반쯤 죽는 이는 더디다. 왜냐하면 온전히 살고 온전히 죽는 이는 바른 생각을 쉽게 돌이킬 수 있지만, 반쯤 살고 반쯤 죽는 이는 망녕된 생각을 쉬기 어렵기 때문에 거기에는 더디고 빠름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게송을 읊으시되,
언제나 자기 코 끝의 뾰족한 것만 보고
남의 눈동자 모가 난 것은 묻지 말라
만일 이와같이 수행해 가기만 하면
어디를 가나 도량(道場) 아닌 곳이 없으리.
법상에서 내려 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