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2.

성도절 법어-해인사 가야총림효봉스님-1948년(戊子年) 12월 8일

1948년(戊子年) 12월 8일
성도절 법어-해인사 가야총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삼천 년(三千年)을 내려 오면서 부처님을 비방하는 이[謗佛者]는 많았으나 부처님을 칭찬하는 이[讚佛者]는 적었으니 그는 옛적 운문(雲門)스님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산승(山僧)이 바야흐로 부처님을 칭찬하려 하노라.

게송을 읊으시되,

공연히 무슨 마음을 내어 저 설산(雪山)에 들어가
육 년(六年) 동안 잠자코 앉아 무슨 일을 하였던고
오늘밤 샛별 보고 도(道)를 깨쳤다 하였지만
도란 무슨 물건이며 깨침이란 또 무었인가.

부처란 청정한 법계(法界)를 더럽힌 미친 도적이요, 부처란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빠져 있는 죄인이다. 왜냐하면 법계(法界)는 본래 청정하고 평등한데 어찌 육도(六途)의 차별을 말하였으며, 일체 중생은 다 위없는 큰 열반[無常大涅槃]에 들어가거늘 어찌 생사(生死)에 윤회한다는 법을 말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의혹을 내개 하였던고.

게송을 읊으시되,
두루 걸은 일곱 걸음[七寶] 그 허물의 처음이요
쌍림(雙林)에서 보인 열반 허물의 마지막이다
천만고(千萬古)에 변하지 않을 허물이거늘
실로 어느 곳을 향해 참회해야 할까.

한참 있다가 말씀하시기를,

오늘 이 산승(山僧)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하여 대중 앞에 참회하리니 대중은 받아들여 용서하겠는가?

한참 있다가 이르시기를,

이제 부처님의 죄과는 없어졌다.

또 말씀하시기를,

대게 도(道)를 배우는 사람들이 찰나찰나 헐떡거리는 그 마음만 쉬면 곧 저 불조(佛祖)와 상응(相應)하리니 대중은 과연 그 불조를 아는가? 눈앞에서 법을 듣는 그것이 곧 부처요 조사이건만 흔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밖을 향해 구하면 마침내 그것을 얻지 못할 것
이다.
삼계(三界)는 마치 불타는 집과 같아서 오래 머물 수 없는 곳, 무상(無常)의 살귀(殺鬼)가 찰나찰나 그치지 않고 귀천(貴賤)과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는다.
이 살귀의 침해를 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부처를 찾아야 한다. 그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대중의 한 생각 그 마음의 청정한 광명이 바로 자가법당(自家法堂)의 법신불(法身佛)이요, 그 한 생각 마음의 분별이 없는 몸이 바로 자가법당의 보신불(報身佛)이며, 그 한 생각 마음의 무루지(無漏智)의 행동이 바로 자가법당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이 삼신불(三身佛)을 저 경론가(經論家)들은 극칙(極則)으로 삼지만 산승(山僧)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즉 이 삼신불은 마치 집을 떠난 나그네와 같고 저 등각(等覺)․묘각(妙覺)은 결박 속에 있는 사람과 같으며, 저 성문(聲聞)․연각(緣覺)은 뒤간의 똥덩이 같고, 보리(菩提)․열반(涅槃)은 장님의 거울과 같은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 도류(道流)들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공(空)함을 깨닫지 못하여 그 때문에 그런 장애가 있지만, 진정한 도인은 그렇지 않아 한 생각 돌이키는 찰나에 다시는 한 생각도 없어, 되는 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가게되면 가고 머물게 되면 머문다. 앉게 되면 앉고 눕게 되면 누우면서 언제 어디서나 한 행상(行相)일 뿐이요 나아가서는 부처를 찾는 한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려 하면 곧 부처에게 얽매이고, 조사를 구하려 하면 곧 조사에게 얽매이니, 구한다는 것은 다 괴로움이라, 도리어 일이 없는 것만 못하느니라.

게송을 읊으시되,

무엇이고 생각이 있는 사람은
일 없는 사람이 되기 어렵네
단박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
섣달에 여드레도 없을 것을.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한 번 울리고 말씀하셨다.

오늘 이 법회에 법을 듣는 대중은 천(千)이요 또 만(萬)이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이 이익을 얻을 것이다. 묻노니 그 한 사람은 누구인고?
억(喝)!

법상에서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