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己丑年) 3월 1일
상당법어-해인사 가야총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천지(天地)에 앞서 한 물건이 있는데, 형상이 없어 언제나 고요하며 홀로 만상(萬像)의 주인이 되어서도 사시(四時)를 따라 변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과 계합(契合)하면 성인중에서도 성인[聖中聖]이요 하늘 가운데서도 하늘[天中天]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는 바로 벌레 가운데서도 뼈없는 벌레[無骨蟲]요 귀신 가운데서도 이름 없는 귀신[無名鬼]이니라.
한참 있다가 이르시기를,
세 사람이 동행(同行)하는데 한 사람은 이렇게 오고 한 사람은 이렇게 오지 않으며, 한 사람은 전연 관계하지 않는다. 세 사람이 동행하는데 어째서 이러한가? 각자 살펴보라.
또 말씀하시기를,
대중들의 눈동자에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들은 지금 금가루를 자신의 눈에 뿌리고 있구나.
부처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마음이다. 마음이 인연을 따라 습관이 성품을 이루기 때문에 선하고 악함과,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차별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마치 여울물이 동쪽을 터 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을 터 놓으면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으며, 또 자벌레가 푸른 빛깔의 먹이를 먹
으면 푸르게 되고, 누른 빛깔의 먹이를 먹으면 누르게 되는 것과 같은 도리(道理)이다.
이런 견해(見解)는 작은 비유로써 큰 것을 보인 것이니, 왜냐하면 무명(無明)의 힘은 크기가 불가사의 하기 때문에 물들지 않으면서 물들어 범부(凡夫)가 되며, 반야(般若)의 힘은 크기가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물든면서 물들지 않아 성인(聖人)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어룡(魚龍)이 큰 바다 속에 사는 것과 같다. 아무리 큰 바람이 불지라도 바다 밑까지는 이르지 못해 어룡의 잠에는 방해되지 않으며, 세상 티끌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자성(自性)의 불토(佛土)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우리 공부에는 장애되지 않는 것이니, 역순
(逆順)의 경계에 있어서 부디 흔들리지 말라.
한참있다가 주장자를 들고 이르시기를,
말해도 삼십방[三十棒]을 내릴 것이며 말하지 아니해도 삼십방[三十棒]을 내릴 것이니, 어떻게 하면 그 삼십방을 면할 수 있겠는가?
대중이 말이 없자 게송을 읊으시되,
획 없는 여덟 팔자를 허공에 쓰니
큰 기틀과 작용이 그 가운데 있도다
선정(禪定)이나 해탈이 귀하기는 하지만
달마(達摩) 문하에서는 가풍(家風)을 잃도다.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한 번 울리고 자리에서 내려오시다.